면도기 소동

바깥양반이 이 글을 보시면 진노하실 터

by 공존


"오빠 이걸로라도 면도 할래요?”

"ㅋㅋㅋㅋㅋ아니ㅋㅋㅋㅋㅋ"


바깥양반이 욕실 문을 두드린다. 머리를 감다가 대충 비비고 바라보니 다리털을 제모하는 여성용 면도기를 들고 서 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젓고 다시 문을 닫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오빠아 어떡해 세면백."

"알아. 아까 보고 있었어."

"어? 봤어?"

"어 나 먼저 나와서 기다리는데 네 손에 세면백이 안들려있더라고. 놓고나왔네 했지."

"왜 아까 말 안했어?"

"ㅋㅋㅋㅋㅋ재밌잖아."


신혼 때였다. 제주도에 여름 휴가를 가서 해수욕장에서 실컷 놀고 나와서 공용 샤워장에서 각자 씻고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바깥양반의 짐가방을 아무리 찾아봐도 세면백이 없었다. 펜션에 먼저 짐을 풀고 나왔을 때 챙기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다.


"내거 가져가."

"응? 오빠는?"

"아니 뭐...남자 샤워장엔 비누 있어. 그걸로 일단 씻지 뭐."


나는 바깥양반에게 내 세면백을 주고 샤워장에 얼른 들여보냈다. 그게 비싼 것은 아니었고, 연수 가서 기념품으로 받았던가, 몇가지 간단한 물품이 들어있었다. 남성용이니 그 중엔 면도기도 있었다.


시원한 물을 맞으며 비누로 몸을 박박 닦고 나와서 주차장 한켠에 앉아 바깥양반을 기다리는데, 저런.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고 샤워장을 나와서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털며 닦는 바깥양반의 손엔 세면백이 없다. 놓고 나온모양이구나. 애초에 자기 물건도 아니었으니 신경을 못쓸만하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느라 지금 여념이 없으시다.


나는 여기서 엉뚱하게도 이것을 가지고 나중에 놀려줄 생각을 하게 됐다. 한번도 안쓴 세면백이지만 내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기도 했고 그냥 그 사실 자체가 재밌었다. 또 바다에 들어갈 일정이 없으니 필요치 않았다. 샤워장 주인장이 나중에 챙겨서 남자 샤워장에 둘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바깥양반이 머리를 다 닦아내길 기다려 차에 태우고는 펜션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 중간을 조금 넘겨 바깥양반은 세면백이 떠올라 황급하게 내게 말했지만, 나는 웃으며 그대로 차를 몰았다. 바깥양반은 꽤나 미안해했는데, 그러고서 사건은 또 그날 밤에 터졌다. 숙소에 와서 번갈아 가며 다시 씻는데, 바깥양반이 내게 물었다.


"오빠 면도기 챙겨왔지?"

"어. 왜?"

"아니 그래도 휴가 왔는데 깔끔하게 다녀야지. 내일 아침에 면도 꼭 하라구."

"어 그거 면도기 아까 네가 놓고 나왔잖아."

"뭐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깥양반과 나의 사정

"아니 아까 말하지."

"재밌잖아.ㅋㅋㅋㅋㅋ"


바깥양반이 좀 덜렁이는 성격이라 이런 일이 왕왕 있다. 나는 유쾌하게 그날밤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함께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바깥양반이 물러나질 않았다.


"오빠 이걸로라도 면도 할래?"


샤워를 하는 내게 자기 다리 면도기를 들고 와서는 이걸로라도 면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을 얼굴 가득 담아서. 나는 웃으며 거절했고 결국 그날 면도는 하지 않았다. 저녁쯤에 일회용 면도기를 하나 샀던가. 어차피 세면백에 들어있던 면도기도 오백원이나 할까 싶은 물건이었다. 다행히 수염이 많이 나지 않는 편이라 티도 잘 나지 않았다. 깔~끔한 얼굴로 같이 다니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 해의 면도기 소동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얼마전.


"꺅! 아파아!"

"뭐야 무슨 일이야."


코로나가 지구를 덮치기 막 시작했을 무렵의 호주 여행이었다. 꽤 긴 여행이었는데 귀국을 며칠 앞둔 날 바깥양반이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지른 것이다.


가서 보니 바깥양반은 양쪽 겨드랑이 뒤쪽에 피를 흘리고 있어다. 마치 천사가 날개를 잘린 흔적인 것처럼, 딱 그자리.


"뭐야 왜 여길 다쳐?"

"아...면도하다가...아야..."

"연고 있지?"

"응..."

"아니 거기가 왜 다쳐?"

"아 오빠 면도기로 하다가..."

"뭐? 내 면도기?"


그러니까, 사연이 이랬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제모의 필요성을 느낀 바깥양반. 그러나 제모용 면도기를 챙겨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그런 사연을 말할 순 없고, 슬쩍 내 면도기로 제모를 하려다가 그만!


"아니 야 이 면도기로 하면 어떡해."

"아니 될 줄 알았지."

"이거 상처봐. 죽 나갔네."


양쪽 어깨죽지에 딱 남성용 면도기 헤드만한 상처들이 생겨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조심 조심 수건으로 두들겨 닦아가며 피를 멈추게 하고 약을 발랐다. 반창고까지 붙여서 겨우 마무리.


"무슨...면도기랑은 궁합이 아닌가봐."

"왜 또 그 얘긴 꺼내."

"아니 자기 면도기는 나 보고 쓰라고 하고 내 면도기는 자기가 쓸라다가 사고 치고."

"아 얘기 꺼내지마."

"글 써도 돼?"

"아 하지마!!"


실제로 나는, 이 재미난 글감을 오랫동안 묵혀왔는데 어제 그만 또 보아버리고 말았다. 우리 바깥양반의 두 어깨 그 아래로 잘려나간 날개의 흔적을. 면도날에 깊이 난 상처라 제법 흉이 오래간다. 언제쯤 다 나으려나 싶기도 하고, 도무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에 이 또한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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