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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22. 2020

근대의 욕망, 근대의 종교

한국사회의 개신교의 개별성

대중과 광기

 <나는 고발한다>라는 연쇄 기고로 드레퓌스 사건에 맞서 양심의 소리를 목놓아 외친 에밀 졸라는 이내 프랑스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증오에 휩싸인다. 프랑스 민중들에게 있어서 드레퓌스는, 유대인은,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대문호였던 에밀 졸라의 명성도, 그리고 드레퓌스의 결백을 밝히는 무수한 증거들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대중을 휩싸고 도는 증오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드레퓌스 대위의 결백이 밝혀졌지만 프랑스 민중들이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갖기도 전에 양차 세계대전은 프랑스를 넘어서 유럽 전체를 감쌌다. 그 시간 내내 유럽은 끝없이 유색인종과 유대인을 향하여, 그리고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제국주의의 경쟁자들을 향한 혐오의 감정을 확대 재생산했다. 혐오라, 얼마나 효율적인 정치수단인가. 최대 50만명의 인원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정당화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팽창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당대의 경제상황을 유대인들 탓이라고 거짓 혐오를 부추기는 것,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그토록 혐오했던 것일까?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음에도, 왜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드레퓌스를 향한 증오를 모두가 함께 나누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한 에밀 졸라마저 프랑스로부터 추방을 시켰던 것일까?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유럽인들이 누구였던가? 유대인들이 누구였던가? 하는 질문은 그 곁에 또 하나의 질문을 소환한다.


당대의 유럽인들은 어떻게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자 오늘은 드레퓌스 사건을 이야기하지 맙시다" (잠시후) "이럴 줄 알았다니까!" 라는 당대의 삽화

근대와 욕망

 <레미제라블>의 시대도 끝이 났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영은 유럽에 막대한 풍요를 선사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유럽의 절대왕정이 거의 다 붕괴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지들이 먼저 권력을 나누어가졌으며 그러고 남은 부스러기를 민중들이 맛보았다. 투표를 통하여 최소한의 국가권력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된 민중은 이제 근대 시민들로 재탄생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근대의 양 날개는 민중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왕정의 신민에서 근대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들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그를 위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행위를 "선택"할 수 있었다.


 특히 자본주의는 단지 삶의 조건만을 바꾸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신용화폐의 개념으로 나아감으로써 부가 무제한으로 축적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중들에게 일깨워주었다. 톨스토이의 우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만, 톨스토이는 틀렸다. 화폐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부의 무한성"을 명확하게 체험시킨다.


 그러나 그들이 그 무한한 부를 향유하기 위해선, 국가라는 조직체가 반드시 필요했다. 유럽의 풍요는 제국의 식민지 경영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한한 부, 무한한 욕망은 이내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불렀지만 이미 무한히 커져가는 욕망이라는 황홀함을 경험한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민중은 국가에, 전체에 통합되는 것이 그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임을 잘 알았고, 드레퓌스와 그 지지자를 탄압하는 것이든 홀로코스트의 광기에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든 기꺼이 선택했다.


 민족주의, 전체주의, 파시즘과 같은 사상 혹은 개념들이 20세기 초에 등장한 것은 그러므로 우연이 아니다. 근대 시민은 욕망의 무한함을 깨달았고,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했으며, 그러한 경험이 국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국가 구성원이 "욕망"을 공유하는 집단이 되어 얼마든지 부외자를 박해할 수 있었다. 드레퓌스사건, 홀로코스트는 근대 사회의 개인들이 어떻게 "전체"에 융합하는지, 그로써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웅변한 상징적인 사건들이다.


한국과 근대, 그리고 개신교

 비극은 한국의 근대와 개신교가 욕망의 동행을 시작한, 경제개발기로부터 시작된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체계적으로 통제했고, 그로 인해 억눌려 있던 욕망은 1960년대 이후 계층 상승과 경제력 축적을 통하여 극복되면서 열배, 백배의 카타르시스를 우리 민중에게 각인시켰다.


 개신교는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그 욕망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가지 차이점은 개신교가 카톨릭이나 불교에 비하여 현대화된 종교이기 때문에 가장 세속적으로 변질될 가능성 또한 컸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막 자본주의가 도입되어 경제성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우리 나라의 종교, 특히 개신교에 크게 나쁘게 작용했다.


 여타의 종교처럼 기복신앙의 성격을 포함하게 된 개신교는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삼박자 구원론이라는, 신앙을 통해서 부와 행복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친자본주의적 교리를 발전시킴으로써 한국 최대의 교회로 발전하는 눈부신 광격을 목격하고 그것을 벤치마킹했다. "장로 대통령" 이명박은 한국 개신교가 갖는 모순과 문제점을 한 몸에 모두 안고 있는 인물이다. 교회 신앙에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전폭적으로 의탁했고, 교회의 교인들은 모두 그러한 욕망을 공유하는 공동체였다. 사랑과 나눔의 가치는 교회의 거대화, 헌금과 자본권력의 축적의 뒤안길로 내몰렸고, 교인들은 자신의 부와 계층상승을 위하여 신앙이 더럽혀지는 것을 외면했다.


 사회구성원들의 욕망을 통제하고 서로 협력하도록 하는 종교 율법조차 개신교의 타락을 막지 못했다. 교회의 독립된 신앙과 성직을 보장토록 하는 개신교의 장점은, 압축성장을 통하여 욕망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함께 맛본 교회의 세속화를 가속하는 촉매가 되었다.


 그 속에서 교회 구성원들은 교회의 성공과 성취를 자신의 신앙과 자아정체성에 투영시켰다. 거대교회 건립, "성전"이라는 반신앙적인 행태가 한국 곳곳에서 발생하는 것은 교인들이 자신의 부와 성공을 교회의 부와 성공과 동일시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한국 교회는 경제개발기에 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유착하며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정된 모순들이 폭발하는 기점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좌파적 사회정책을 공산주의라고 배격하고, 민주정권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하는 것이 가장 퇴폐적인 자본주의 사상임을 목사들은 알고 있을까? 민주화로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에게 정치참여의 길이 열리는 가운데 교회가 적극적으로 보수정권과 결탁하고, 민주정권에는 적대적인 것은 교회가 신앙적으로나 사회조직으로서나 병들어 있었음을 알려 온 가장 선연한 경종이었다.


 드레퓌스사건에서 보였던 프랑스인들의 비이성처럼, 코로나 방역에 비협력적인 교인들의 태도는 진실보단 자신들의 욕망, 욕망을 투사하고 실현할 매개인 교회에 충성코자 하는 그들의 비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차라리 세금 거부는 귀엽기라도 하지, 땅 없이 하늘이 있단 말일까? 하늘에서의 승리, 영적인 승리를 위해 현세를 지옥으로 만드는 다수 개신교인들의 행태는 오로지 전체=교회에 모든 자신의 자아를 의탁함으로써 개인의 실현을 도리어 외면하는 전체주의의 병폐를 명백히 보여준다.


 근대 시민은 계층 상승과 부의 획득을 경험하고, 그것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더 많은 부와 풍요를 향하여 국가에 몸을 내맡겼다. 그 댓가는 유럽 전체를 죽음의 불구덩이로 내모는 전쟁의 참화였다. 한국 교회는, 계층 상승과 부의 획득을 경험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통제하는 길을 아직까지는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 많은 "성전"들은 무너질 수 있을까? 교회의 성세에 의지하지 않은 신앙의 실현은 가능할까? 헌금수익의 감소가 두려워 대면예배조차 포기하지 못하는 교회는 오늘 또 하나의 죄업을 쌓아올려갈 뿐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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