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광렬이형 개멋있어
어- 그러니까- 웬 <청춘의 덫>인가 하면-
그것은 월요일 밤이었다. 밤에 거실에서 유튜브로 음악을 재생해 놓고 바깥양반과 나란히 책을 보고 있는데, 우연히 화면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심은하의 옆얼굴의 곡선이 능란한 한장의 사진. 비록 내가 그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워낙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고, 예~전에 바깥양반과 군산에 가서 초원사진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도 나고. 무엇보다도 심은하 하면 생각나는 것은 <청춘의 덫>이다.
"나 안봐서 몰라. 무슨 내용이야?"
"어? <8월의 크리스마스>는 봤는데 <청춘의 덫>은 안봤다고?"
"아니. 그것도 안봤지 언젯적 영환데."
나도 아직 어릴 때고 바깥양반은 중학생이 되지 못한 나이여서 당대의 화제작 <청춘의 덫>을 몰랐나보다. 당시 17세의 혈기방창한 오덕후였던 내가 TV에서 하는 통속극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드라마를 제법 봤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전광렬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전광렬 배우는 <청춘의 덫> 직전에 <종합병원>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꽤나 젠틀한 훈남의 이미지로 등장을 했다. 그런 샤프한 이미지를 좋아하던, 그리고 여우보단 남우에 관심이 많던 나였기 때문에(중2병이 이렇게 무섭다.) 자연스럽게 누나 옆에 앉아서 강제로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전광렬의 연기를 봤고, 그 뒤에 <청춘의 덫>이 방영될 때는, 다른 장면은 신경을 쓰지도 않다가 전광렬씨의 등장분만, 그것도 중반부 이후 서윤희(심은하 분)와 노영국(전광렬 분)의 교류가 내밀해질 때쯤부턴 꽤나 관심있게 봤다.
역시 그 중에 최고의 대사는 "날 이용해요. 이용당해 주겠소."와 "내가 사랑해!"겠지. 크으~ "난 상무님을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대사 뒤에 "내~가 사랑해!"라니. 그때, 꽤나 이 대사가 히트쳐서 성대모사도 왕왕 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야야야 보자보자. 유튜브에 있나?"
나는 리모콘을 들어 유튜브 검색창에, 또박또박 청춘의 덫을 검색했다. 오? 있군? 있어? 10분씩 끊어서지만, 있다. 한번 틀어볼까.
"오. 나온다 나온다. 오...괜찮네 화질이."
코로나 블루를 직격으로 맞으신 터라 만사 귀찮으신 바깥양반은 책을 본다고 내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나도, 전광렬씨의 등장분이 아니면 꼭 봐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드라마를 보니, 초반부에 서윤희의 착한 심성이나 강동우의 배신의 개연성, 복잡한 내면과 재벌가의 복잡한 속사정까지. 김수현 작가답게 꽤나 치밀하다. 게다가, 대사빨이 쩌렁쩌렁 고드름처럼 날카롭고 서늘하다. 인물의 모든 감정이 긴 호흡의 대사에 꽉꽉, 눌러담아져 나온다.
1999년 드라마의 때깔을 보는 것도 꽤나 재밌고, 경기도 방언스러운 "~잖어"를 주로 쓰는 당대의 드라마의 화법 등도 재미나다. 한 편을 4등분 한 첫번째 10분여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광고를 잠시 기다리는데...아싸. 바로 1 다시 2편, 즉 1화를 넷으로 나온 두번째 편이 자동 재생된다.
"안봐?"
"보고 있어."
그 사이 바깥양반은 소파에 옆으로 누워서 세상 편한 자세로 폰을 하고 있다. 폰을 하면서 TV를 하는 건 내 특기이기도 하니까 믿을만하지. 나는 나대로 다시 책을 본다. 전광렬 씨가 나오려면 한참 걸린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났고, 화요일에 또 집에서 몇시간, 수요일에 또 몇시간. 수요일에 드디어 전광렬씨가 등장해서 마흔살의 초롱초롱했던 외모를 뽐낸다. 그리고 어제 목요일엔 드디어, 서윤희에게 노영국이 청혼을 했다. "아이가 있었어요."라는 서윤희의 고백에 충격을 받아 의자를 뒤로 돌리고 엄숙한 목소리를 내던 노영국이 몇분 뒤, 차분하고 세련된 얼굴로 다시 그녀를 마주보고 하는 말.
"날 이용해요. 이용당해 주겠소."
캬 이 대사를 2020년 다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청춘의 덫> 종영 직후 전광렬 씨는 <허준>을 촬영해서 MBC 드라마 사상 최대의 히트작 중 하나의 주연배우가 되었고, 거기에서도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1화부터 마지막화까지 거의 빼놓지 않고 봤는데 심지어 1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검도 도장에서 빠르게 뛰쳐나와서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저녁밥을 먹으며, 허준의 나무 타고 돌려차기를 본 기억도 선명하다.
21년이 지나, 아직도 여전히 여우보단 남우에 관심이 많지만(중2병이 이렇게 무섭...응?) <청춘의 덫>의 여러 장면들에 바깥양반과 나의 모습이 스치기도 하고, 그런 통속극에 몰입도 이입도 공감도 쉬워졌음을 느낀다. 나이를 이리 먹는가. 전광렬 씨는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되었고, 심은하씨도 은막의 스타 자리에서는 진작 사라졌지만, 명작은 영원한 것. 오랜만에 전광렬의 노영국을 보는 즐거움이 참으로 크다.
어젠 그래서 TV를 끄면서 바깥양반에게 한마디.
"24부작인데, 벌써 절반은 봤네."
"아 안돼! 이거 보는 낙으로 밤에 집에 있는데!"
얼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