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맛있어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차리다가 냉장고를 보고 아차 했다. 두부가 있었지! 주말에 뭘 해먹었는지 기억도 안난다. 5일 전쯤에 사온 긴 두부가 냉장고에 고이 잠자고 있었다. 오늘은 퇴근하고 두부조림을 해야지 생각을 하며 서둘러 밥상을 치운다. 오늘은 두부. 그리고 김치찌개도 끓여야겠다. 마침 아침이 김치볶음밥이었거든.
옛날식으로 제대로 만든 두부는 정말 맛있다는데, 마트에서 대강 사오는 두부들 중에 정말 맛있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진짜 맛있는 두부는...콩의 고소한 맛 그 자체지. 그런 두부는 부치는 것도 아깝다. 뜨거운 물에 살짝 담가서 데핀 다음에 살살 썰어서 먹으면 아 참 맛나겠다. 그런 두부에는 싱싱한 새 김치가 맛있지. 아차차 너무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 두부 조림. 두부 조림. 당근도 있고 파도 있고...돼지고기 앞다리만 사가면 되겠다.
퇴근 후 앞다리 살을 조금 사서 두부를 부치기 시작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센불에 부쳐야 해서 두부를 올리는 순간 파파박! 하고 기름이 사방으로 튄다. 그러나 두부조림의 맛깔난 그 맛을 생각하면 이정도쯤이야. 도마 위에 고기를 올리고 손질하고, 김치도 썰어 냄비에 넣고 끓이는 둥 바쁘게 주방을 오간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될만큼 선선한 날씨에 분주한 주방이 그래도 견딜만하다.
그런데, 팩에 든 두부를 샀는데 막상 자르고 보니 영 크진 않다. 지난주에 곱창을 샀던 시장에 가면 좋은 두부를 좀 살 수 있을듯 하다. 흐음. 두부에는 돈을 아낄 필요는 없겠지. 공장에서 나온 작고 길쭉한 두부보다, 큼지막한 손두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수고는 감내할만 할 테다.
손에 뜨거운 기름을 묻혀가며 두부가 헝클어지지 않게 하나 하나 뒤집고, 그 사이에 파와 고기를 썰어서 준비를 한다. 내멋대로 레시피이니 앞다리 살에서 비계가 많은 부분들은 두부조림에 넣고, 살코기는 같이 끓이고 있는 김치찌개에 넣는다. 그렇게 하면 부드러운 두부와 쫄깃한 돼지비계가 서로보완도 되고 풍미도 한결 살아난다. 엄마는 이런 걸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리고 만약에 중국식을 좀 따른다면 얇게 저민 돼지살코기를 밀가루에 묻혀 튀긴 다음에 조릴 때 마지막에 넣어도 맛깔날듯은 하다. 어쨌든 간에,
먼저 파를 넣고 충분히 파기름이 나도록 볶은 뒤에 돼지고기를 넣고 한참 다시 볶는다, 돼지고기에서 기름이 녹아나올 때면 마지막으로 당근을 넣는다. 이때쯤에 양파와 마늘도 같이 넣으면 좋긴 하겠지만 주방이 넓은 것도 아니고 이미 여기까지 오느라 어지간히 어질러져 있어서 좀 뒤로 미뤄뒀다. 양파는 아삭아삭함이 좀 살아있어도 좋을 테니 늦게 넣기로.
이때쯤에, 엄마의 두부조림을 생각해보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1~3위가 모두 엄마의 조림류다. 1위가 엄마표 두부조림, 2위가 엄마표 고등어조림, 3위가 엄마표 오뎅볶음인데, 그러니까 어릴때 즐겨먹던 밥도둑 반찬들이란 말씀. 특히 엄마는 자반보단 생물로 자주 생선조림을 하셨던 편이라, 고등어조림이 참 군내 하나 없이 맛나다. 그러나 그런 맛깔난 고등어조림보다도 맛난, 두부. 포실포실하면서 쫄깃하게 튀긴 두부에 달고 짜고 매운 양념, 중간 중간 버섯과 당근으로 살려낸 식감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일 수 밖에.
밥솥에는 새로 앉힌 밥이 칙칙 김을 뿜어내고 있다. 엊그제 누나에게 받아 온 병아리콩까지 넣었다. 후라이팬을 정돈하고 두부를 넓게 펴서 자리를 충분히 만들어서 깔아둔다. 그리고 굴소스와 집간장(그, 된장 냄새 나는), 후추와 마늘, 양파를 차례로 넣고 물을 한 컵 가득. 이제는 팔팔 끓이기만 하면 된다. 아차, 설탕. 설탕도 대강 뿌린다.
두부조림은 참 신기한 요리인게 대충 만들어도 맛있다. 그래봐야 고작 이번에 두번째 만든 것이지만 두부 자체의 감칠맛이 워낙 뛰어난 식재료다보니 굴소스 외에는 조미료도 필요 없다. 넉넉히 볶아서 충분히 풍미를 낸 파, 그리고 두품한 돼지비계, 달달한 당근까지, 그냥 맛있는 재료를 모아서 대충 볶고 졸이기만 해도 맛있다. 이렇게 재밌으면서 맛있고 편한 요리라니.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고춧가루 반스푼을 토옥.
두부가 넉넉히 졸여질 때쯤 밥도 완성이다. 한시간 사이에 마더스 매직을 흉내낸 주방이다. 따로 조금 썰어낸 두부는 김치찌개에 풍덩, 국물에 시원한 맛이 더해진다. 밑반찬이라면 밑반찬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울 일인가 싶기도 한데, 접시에 일부 담아내고 보관용기에 담으니 애개. 생각보다 많은 양이 아니다. 반찬을 많이 깔지 않고 그때 그때 조금씩 장만해서 먹는 살림이라, 식탄을 실팍하게 채워줄 두부조림이 이렇게 조금밖에 만들어지지 않으면 좀 아쉽지. 그럼 뭐 어때. 손두부를 사러 가기로 했으니 당장이라도 또 두부조림은 하면 될 일이다. 두근에 만원 주고 산 앞다리살도 아직 한참 남아있고 말이다.
자...9월의 첫날,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저녁밥상이다. 오늘 밤은 생기부 점검 때문에 눈이 빠져라 모니터를 봐야 한다. 자정을 넘겨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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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