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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03. 2020

얼 게이로 만든 스콘

정 정 당 당 한 제 목 정 정 당 당 한 스 콘

 스톡홀름을 떠나는 날이 프라이드 데이였던 것은 계산 밖이었다. 스톡홀름 스테이션 앞의 비즈니스 호텔에서 묵으며 여행한 몇일간 도시 곳곳을 빼곡히 채운 프라이드기의 여섯 빛깔을 보면서 단지 인권 선진국의 알록달록함이 즐거웠을 따름인데 이런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니. 컨시어지에게 캐리어를 맡기고 마지막 산보를 즐기기 위해 나왔을 때는 이미 거리는 축제를 즐기는 인파로 가득했다. 별다른 노출 없이 편안한 평상복으로 퍼레이드를 즐기는 사람들 속을 누비며 몇가지 기념품을 추가로 샀다.


 그중에는 가르치는 아이 중에게 줄 프라이드 칼라 고글도 있었다. 뮤지컬 배우의 꿈을 꾸는 아주 당찬 녀석이 신입생 때부터 언행과 품행에 개성이 도드라지더니만, 스리슬쩍 주변 친구들에게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커밍아웃하고는, 심지어 학내에서 여자친구끼리 손도 잡고 다니던 것. 아끼는 학생이라서 이왕이면 동성혼이 합법인 선진국 스웨덴에서 사간 기념품이라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중간에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그 고글은 학생녀석에게 잘 전달되어 그 아이는 서울 퀴어 페스티벌에도 쓰고 갔다나 뭐라나.

대충 이런 것

 그리고 나는 살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기어코 사기로 결심하고 슈퍼마켓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웨덴에 온 첫날 보고 빵터졌던 물건. 바로 얼게이티. 이게 상시 판매품인지 아니면 프라이드 축제 한정 판매품인지 모르겠는데 아아, 이 멋들어진 디자인. 창의적인 네이밍!


 하도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겨 영어로 된 설명서 부분을 읽어봤다. 내용물은 그냥 평범-하고 스탠다-드한 얼그레이 티인데 R 자 하나를 빼서 언어유희를 한 모양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안 살 수 없잖아? 바깥양반이 내 캐리어에까지 자기 짐을 워낙 밀어넣는 통에, 그리고 4개국을 다니는 일정이라 짐을 공연히 늘리기 싫어서 구매욕구를 꾹 참고 눌렀던 물건인데 드디어 망설임 없이 사기로 했다. 이왕 사는 김에 친한 선배에게도 선물하기로 해서 두개.

 집에 티가 퍽 많아서 얼게이 티는 그러나 빠르게 소진되고 있진 않았다. 여름 북유럽 다음엔 겨울에 상하이였는데- 상하이가 어디냐 중국 아니던가. 당연히 신나서 자스민티를 비롯 여러가지 차 종류를 사와서 즐기다보니 얼게이티는 어느새 슬쩍 뒷전으로 밀렸다. 이 사이에도 나는 하루 하루 커피를 내리며 공부를 더 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얼게이 티는 이따금 색다른 선택 정도로 남아있었는데.


^^ 저는 그 중애서 얼그레이 스콘을 자주 해먹은답니다 ㅎㅎ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작가님 *^^*


 금융과 문학 만큼이나 다양한 식도락도 즐기시는듯한 이웃 작가 문학소년님께서 재미난 글감을 주셨다. 얼그레이 스콘! 우리 집엔 얼그레이 티가 있다. 그리고 나는 스콘을 만들 열정이 있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 없지. 만든다! 얼그레이, 아니 우리집에 있는 건 얼게이티! 얼게이 스콘!

 따단.


 버터를 박력분에 빠닥빠닥 빠르게 치대다가 잠시 쉬어준 뒤에 얼그레이를 (커피 가는) 그라인더에 갈았다. 그냥 넣어도 입자가 매우 작은 편이라 먹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 같지만 두가지 문제. 하나는 얼그레이 티의 풍미가 반죽 전체에 퍼지게 하려면 최대한 갈아서 스콘 반죽 속에 퍼지게 해야 한다는 점. 두번째는 바깥양반이 분명히 얼그레이 가루를 갈지 않고 넣으면 인상을 찡그리며 이상한 식감이라고 뭐라고할 것이라는 점.


 사실 이 레시피에는 한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레시피를 찾아보지 않고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는 영상을 따라서 만들어봤을 때는, 티를 우려서 국물을 넣다보니 스콘이 아니라 밀가루벽돌같은 괴작이 탄생했다. 티를 우려넣은 만큼 밀가루가 들어갔고 그래서 반죽에 버터의 비율도 와장창 해버렸던 것이다. 물론, 애초에 레시피를 보고 했더라면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을 테지만 그랬더라면 내가 배운 다른 교훈을 얻지 못했을 테지. 묻기 전에 해보는 것은 항상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


 자. 그래서 시행착오와 완전한 레시피의 교훈을 합쳐 만든 완전판 얼그레이, 아니 얼게이, 아니 음...엄...얼그레이 스콘. 그래그래 얼그레이 스콘으로 이젠 통일하도록 할까. 이 반죽을 만든 것이 대략 자정 무렵이다. 아침이 되면 오븐에 구워서 바깥양반 도시락으로 싸줄 예정이니까, 밤새 휴지시킬 수 있어서 소량의 인스턴트 이스트 분말과 베이킹 파우더라도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내줄 수 있을 것이다. 계란을 깨서 흰자만 쏠랑 붓고 노른자는 계란액으로 위에 발라주기 위해 따로 용기에 담는다. 최대한 짧게 반죽을 치댔는데도 주방에 버터 내음이 진동하는듯하다. 나는 빠르게 냉장고에 노른자와 반죽을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오븐을 예열부터 하고 스콘 반죽을 토막낸다. 팬에 기름. 그리고 노른자를 톡 터트려서 계란물 샥샥. 이틀에 한번 꼴로 벌써 다섯번째 스콘이다. 그 동안 마음에 들지 않게 된 것도 많았지만 얼 게이 티를 넣어 만들기로 한 오늘의 스콘은 정말로, 정말로 완벽하다. 완벽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받으며 오븐에 반죽을 넣고, 나는 아침으로 먹을 김치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 야야야야야 마누라 마누라

- 왜ㅠㅠ 바빠ㅠㅠ

- 스콘 먹어봐 스콘

- 짱짱 야 존맛탱

- 아ㅠㅠ 알았어


(10분 뒤)

- 먹었어? 맛있지 맛있지


(15분 뒤)

- 야아아아아 씹냐아아아아아


 젠장. 세 토막은 바깥양반에게 주고 한토막만 학교로 가져왔는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막 그냥 막 그 냄새가 막. 버터에 얼그레이 향기가 막. 그래서 학교에 오자마자 엄지손톱만큼씩만 떼어서 이 사람 저사람에게 주었는데 막. 사람들은 무덤덤한 반응인데 나는 완전 황홀하고 감동하고 막.


 얼그레이티를 갈아서 분진까지 탈탈 털어 넣은 게 성공이었을까. 강하지 않고 부드럽게, 스콘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목부터 기도, 그리고 코까지 향긋함으로 꽉 채운다. 우유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서 버터의 함량이 그대로인지 다소의 퍽퍽함,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촉촉함이 딱 스콘의 식감이다. 맛있다. 와 짱이다. 내가 만든 얼게이 스콘. 아니 얼그레이였나.


"스콘 다 먹었냐?"

"아니 하나 남겼는데."

"좋아! 집에 가서 연출 사진 찍자!"


 퇴근길에 바깥양반을 만나자마자 첫 질문은 세덩이 스콘의 행방이었다. 쬐끔, 많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도 한조각이 남았다. 오랜만에 저녁을 밖에서 먹고 집에 와서 바깥양반의 도시락가방에서 스콘을 찾았다. 흐음. 이왕이면 티도 같이 찍을까. 얼그레이티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맛있는 다른 홍차를 찾아서. 모처럼 연출사진이다. 이 스콘은 나의 금기를 어길만한, 그런 마력의 요리였다.

 아. 얼게이티 통도 놓고 찍을걸.

...에이 그냥 그래도 통 사진도 안 올릴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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