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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Nov 10. 2019

이 결혼, 하길 잘했다

내 입술이 싸늘한 무언가 날아와 스칠 때

“바깥양반, 이거 안무서워?”

“왜? 게임 속에 있는 거잖아.”

“아니 생긴 것도 징그럽고 소리도 엄청 리얼한데.”

“내가 하는 게 아니라서 그냥 안무서워.”


 <하고 있는 나는 쫄려서 숨질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말하면서 좀비에게 사격을 계속했다. 겨울, 주말에 저녁을 먹고 함께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나는 새로 나온 좀비호러게임에 열중하고 있고, 바깥양반은 거실에서 이불을 덮은 채로 내 뒤에서 귤을 까먹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바깥양반은 공포영화를 절대 보지 않으며, 스릴러영화조차 조금 끔찍한 장면은 두 눈을 가릴 정도로 겁이 많다. 대학로 공포연극조차 “그런 걸 왜 봐 도대체?” 라며 거절. 집에서 밤에 귀신 울음소리라도 내면 질색팔색을 한다. 그런데 어째서 거실에서 같이 앉아서는 내가 하는 좀비게임, 그것도 완전 무서운 공포게임을 무덤덤하게 구경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어지간한 공포영화는 낄낄대며 보는 나도 지금 어깨가 결릴 정도로 힘든데.


 바깥양반은 내가 좀비에게 물리건 말건, 좀비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폰으로 서핑과 인스타그램, 카톡을 하며 태평하게 귤을 먹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감사해야 마땅한 점은, 내가 게임을 몇시간을 하든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친구는 결혼하고 일단 바깥으로 축구를 하러 나갈 수가 없고, 축구게임으로라도 대리만족을 했는데 당연히 아내가 반대해 하지 못한다. 절친한 선배는 PS4 게임기 업그레이드판인 Pro 모델을 몇개월 전에 샀지만, 포장조차 뜯지 못했다.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 게임을 좋아하는 내 친구는 슈퍼마리오와 포켓몬스터를 아직 한글도 못깨우친 아들을 앉혀놓고 한다. 뭐 어느 가정이나 부부만의 규칙을 세워두는 법. 내가 들은 가장 짠내나는 케이스는 소파에 앉아 폰을 가로로 눕히자마자 폰을 빼았겼다는 어떤 신혼인 남편의 이야기다.


 우리집의 경우엔...내가 학교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일을 많이 하고, 교육감 표창도 두개나 타 놨다. 부장도 3년째 마친 상태고 이래저래, 돈 벌어오는 일로는 구박을 받을 처지는 아니긴 하다. 집안일은 95% 정도를 하고 있고 이날도 바깥양반은 내가 차린 밥, 간식 등으로 평안하게 하루를 보내고 쉬는 중. 그렇다고 이렇게 자유를 막 줘도 되는 것일까.


 딱히 협의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바깥양반에게, 바깥양반은 나에게 서로가 원하는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아이가 없어서 더욱 그런거겠지만, 외출, 외박, 음주에 대하여 서로 원하는만큼 허용한다. 우리 바깥양반은 무려 신혼여행 2주 뒤에 직장 동료들과 속초 여행을 다녀오셨으며 나 역시 이번 11월과 12월 각기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 음주라고 해야 나는 많아야 일주일에 한 두 번에 바깥양반보다 외출 횟수도 훨씬 적으니까 외박도 가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게임을 몇시간이나 해도 별 말이 없는 것엔 감사할 따름.


 ...라는 생각은 지금 글을 쓰며 회고해보는 것이고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저 열심히 좀비로부터 달아나고 있는데...싸늘하다. 입술에 싸늘한 무언가가 들어와 박힌다. 달다. 말랑말랑. 귤이다.


“헐.”

“(오물오물)”

“바깥양반, 지금 나 귤 먹여준 거야?”

“응.”


 그것은 귤이었다. 거실에 엉덩이 깔고 앉아 좀비를 잡고 있는 남편에게, 바깥양반이 까서 입에 넣어준 싱싱한 작은 귤.


“헐 대박. 나 결혼 완전 잘함. 쩔어. 게임하는데 귤 까서 입에 넣어줬어.”


 바깥양반은 내 감탄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폰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말 내가 게임 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은 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변에 몇번이나 자랑을 했다. 대체로 부부 간에 게임으로 인하여 어떤 다툼이 생기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귤을 까서 입에 넣어주는 것은, 프로게이머 출신 부부들이나 가능한 것 아니겠나며.


 마침 그때쯤이 일년반쯤 되어가는 결혼생활의 다툼이 많이 정리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가사분담이나 경제문제, 생활습관의 불일치로 이혼하네마네를 몇번쯤 나 또한 들먹였었고, 그러다가 서로 놓아줄 것은 놓아주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결혼생활에 적응하던 시기. 거실 TV로 게임을 하는 것보다 훨씬 서로에게 무의미한 일로 싸우면서 결혼을 후회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었다. 처음부터 누구도 남편이고 아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그리고 각자의 인연으로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나와 바깥양반은 결혼이란 새로운 정체성의 공간의 임자가 되기 위한 성장통을 각자 호되게 겪었다. 빨래통의 양말도 거실의 휴지조각도 그러고 나서는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 뒤로 변한 것은, 딱히 없다. 삶이란 연속성을 엮어내는 것은 어떤 한번의 감정이 아니라 수백가지의 실타래이고, 어떻게든 싸울 일이 또 생긴다. 그러나 내 입으로 들어온 귤처럼, 같이 있지 않으면 평생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요즘은 버블티를 사서 같이 집에서 마시는 게 낙이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바깥양반과 나 둘 다 이유도 없이 푹 빠져있다. 살찔 것 같은데, 버블티라는 실타래가 하나 더 엮여졌다. 바깥양반은 요즘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있다.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조만간엔 주변에 자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주는 김장이다. 바깥양반과 나 각자 친구들과 토요일에 여행을 갔다가 일요일 오전에 올라와 우리집으로 김장을 하러 간다. 바깥양반은 시집 오기 전에는 평생 남의 김치를 먹던 사람이다.

 

 반대로 나는 “이 결혼 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바깥양반에게 충격적 경험을 준 적은 있었을까 싶기는 한데. 공연히 그런 말을 입밖에 내어 횡액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다. 집에 가면 쌀을 씻고, 빨래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를 해야지. 그런 뒤에 책을 조금 보다가 게임을 해야겠다. 시장에 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깥양반은 이번 주말도 흡족하게 보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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