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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22. 2019

모닝 옥수수 라떼

그리고 아침에 영 기운을 못 쓰는 저혈압 그녀

 기억을 되돌리다 보면 고등학생 시절의 아침이다. 고 2때 나는 -1교시를 수강하는 학생이었고 등교시간이 6시 30분까지였다. 학교에서 야심차게 밀어붙인 특강이었지만 학생들의 체력 부담으로 해당 수업은 1학기만 운영되고 더 이어지진 못했다. 그 수업을 들으면서 엄마는 매일 5시 30분에 아침을 차려주셨고, 나는 밥상까지 기어서(문자 그대로) 눈을 감은 채로(문자 그대로) 밥을 삼켰다. 


 고3이 되자 아침 기상 시간은 6시로 유지됐지만 대신에 나는 자는 시간을 계속 늦췄다.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나와,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으며 마지막 정리를 하고 3시에 잠들었다. 등 대고 누워 자는 단 세시간. 여섯시에 어김없이 밥상은 차려지고 여전히 나는 밥상까지 기어서, 눈을 감고 밥을 삼켰다. 아침 식사를 차리는 것은 아침을 먹는 것보다도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스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숟가락으로 입을 더듬어 아침을 먹는 것도 차리는 것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꺼이 잠을 잘 수도 있는 일. 아침밥을 포기하고. 


 처녀 시절 바깥양반은 아침을 먹지 않았다. 저혈압인 그녀는 아침 식사보다 단 5분만이라도 잠을 더 자는 것을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장모님은 바깥양반의 고집을 꺾는 성정은 아니셨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한 이래 항상 아침밥을 먹어 온 내게 시집을 와, 그것도 아침마다 구색을 갖추어 밥상을 차리니 바깥양반도 아침을 거르지 않는다. 한편 군대를 다녀온 뒤로 나는 더는 엄마의 밥상을 얻어먹지 않았다. 다시 5시 30분. 밥에 물 말아서 양념새우젓갈, 김치 하나 딱 놓고 홀홀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아침을 차려먹는 것은 습관이고 스스로 상을 차린 것은 염치였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엄마가 냉장고에 쟁여놓은 식재료들이 점점 관리가 필요한 상황에 다다르면서 내 아침 준비가 조금 분주해졌고, 그 대신 풍성해졌고, 그 상태로 바깥양반과 살림을 차려 아침을 같이 먹는다. 

 오늘은 일요일. 이른 아침 출근을 하게 된 바깥양반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 평소보다 30분 이상 일찍 일어나게 된 그녀가 아침식사를 거름으로써 취침시간을 확보코자 했기 때문이다. 밥 먹는 시간 10분을 포기하면 30분이 아니라 20분만 일찍 일어나면 된다. 여러 해 같이 살면서 바깥양반의 우선순위를 잘 알기에 나는 미리 다른 메뉴를 생각해뒀다. 옥수수를 좋아하는 바깥양반 취향에 맞춤한 옥수수 라떼. 


 옥수수 라떼를 지난주에도 한번 해준 바 있다. 내가 바깥양반을 떼어놓고 친구들과 제주도에 여행을 다녀오면서 떠나는 날 아침 토스트와 옥수수라떼를 만들어두고 나온 것이다. 당연히 레시피 따위는 검색할 생각 없이 감으로 만든 것이라, 처음 만든 옥수수 라떼의 맛은 참으로 심심달짝지근하기만 했다. 옥수수를 적당히 믹서에 갈아 설탕, 우유와 함께 끓여내고, 거기에 마지막으로 옥수수 알을 토핑한 것이 끝. 옥수수가 적당히 퍼지면서 나오는 풍미도 없고 급하게 끓여낸 것이다 보니 우유가 맛나게 졸여지지도 않았다. 그냥 다소의 옥수수 내음과 설탕 맛이 느껴지는 끓인 우유 정도? 그보단 토스트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어 옥수수 라떼엔 신경을 쓸 여유가 없기도 했다. 


 오늘 기회가 생겼으니 이번엔 제대로 레시피를 짰다. 항상 이런 식이고 이쪽이 즐겁다. 레시피 검색 없이 혼자 한번 만들어본 뒤에 두번째에 시행착오를 고치는 것. 풍미를 더하기 위해 한스푼 가량의 오뚜기 스프 가루를 옥수수와 함께 갈았다. 옥수수를 충분히 끓이기 위해 먼저 물과 함께 5분 정도 끓인 뒤 설탕과 우유를 넣었다. 후라이팬에 버터와 한 스푼의 옥수수알을 올려 볶아, 토핑에도 구색을 더했다. 거품을 내며 팔팔, 충분히 끓여진 옥수수 타래죽은 스프 분말이 첨가해준 풍미(심지어 양송이 스프였다)와 함께 옥수수의 진한 향을 내고 있었다. 우유가 졸여지면서 더욱 고소한 맛이 솔솔 피어오르고 설탕이 녹아들면서 타래죽이 아닌 옥수수 라떼로의 변신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 바삭하게 볶아진 버터구이 옥수수알을 올려, 완성. 


 다만 너무 뜨겁다. 점성이 진해 물보다 빨리 식을 것 같지도 않아 종이컵을 꺼내 담았다. 아직까지 머리를 말리고 있는 바깥양반에게는 적당히 맛만 보고 출근 길에 차 태워줄 테니 사무실 가서 나머지를 모두 마시라고 했다. 


"아 뜨거!"

"응? 많이 뜨거워? 그래서 종이컵에 담았는데."

"혀 댄 것 같은데?"


 한 입 마셔본다. 악명높은 매생이죽처럼 열기를 머금은 옥수수 조각들이 입 안에 달라붙어 조금 놀랄만큼 뜨거웠다. 그래도, 만족할만한 맛이다. 


"차 흔들리면 흘리지 않게 조금만 먹어."

"응. 오빤 얼른 내려가 있어."


 잠시 뒤 바깥양반은 종이컵을 양 손에 쥐고 내려왔고, 차에 내릴 땐 옥수수라떼를 양 손에 들고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에 올라갔다. 저혈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이 찬 바깥양반에게도 일요일 아침 출근에 나쁘지 않은 위로 혹은 선물이 되었을까.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 이 글을 쓰는데, 어제 술을 마시고 와서 아침을 차리긴 귀찮고 그러나 배는 고프다. 겨울이라 홍삼차를 하나 끓여 앉았다. 그래, 오늘 내 아침은 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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