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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11. 2019

스팸 Girl

어떻게 스팸을 내 요리보다 좋아할 수 있어요

-나 이제 끝났어. 배고프다.

-얼른 와용.

-응 저녁은 피노키오.

-치오피노.

-키...노피오?

-치오피노!


 겨울이 바싹 다가와 있었다. 평일 중에 바깥양반과 드물게 집에서 저녁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바깥양반은 바깥양반대로 야근과 자기 일정이 있고 나 역시 이리저리 바쁜 시기다. 몸도 지치고 쌀쌀하니 저녁엔 뭐라도 따끈한 걸 먹고 싶어서, 치오피노를 하기로 마음먹은 참이다. 

사진 오른쪽 요리. 왼쪽은 함께 만들어본 복숭아 코블러.

 미국 서부에서 두루 먹는다는 해산물요리인 치오피노를 샌프란시스코 여행으로 처음 맛봤는데 그 맛이야 뭐, 신선한 해산물 맛이지. 토마토 페이스트와 허브 정도가 고민거리인 요리지만 삼겹살을 구워먹을 때 쓰는 허브솔트와 생 토마토 두 알이면 어렵지 않게 흉내를 낼 수 있다. 냉동 새우와 조개, 오징어와 펜네 파스타가 있으니 20분이면 넉넉잡고 저녁 한 끼 뚝딱 가정식 치오피노를 만들성 싶었다. 이미 몇 주 전에 주말에 해먹어본 적 있고. 


 그러나 자꾸 장난을 치고 싶어, 나는 바깥양반에게 농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확 추워지니까 부대찌개도 땡기긴 하네.

-오.

-그래도 역시 치오...피노...치노피오?

-부대찌개면 고!

-어?


 아. 내 실수다.


-...아니, 저기요 선생님.

-왜요

-아니 내가 치오피노 해준다니까?

-부대찌개면 해줘요.

-아니, 야........치오피노를 팽개치고 부대찌개면을 해달라고?

-응 그게 땡겨


 이 뜨거운 스팸 사랑. 


 바깥 양반은 스팸을 좋아한다. 유난히 좋아한다. 기름에 바싹 구운 계란 후라이에 곁들이는 햄과 스팸. 특히 그것이 아침 반찬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메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시국에 치오피노를 부대찌개로 받을 줄이야. 게다가 나는 햄을 국물요리에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가끔 생각날 때나 아니면 밥을 차리기 영 귀찮을 때나 스팸을 찌개에 넣는 편이라 이 상황에 상당한 서러움이 몰려왔다. 아니 치오피노에 재료가 몇개나 들어가는 줄 알아?


 집에 도착해 툴툴 대며 저녁을 차렸다. 김치 대충 썰고, 스팸 대충 썰고, 비엔나 대충 썰고, 라면 하나 뜯어 대~충 끓여서 낸다. 아, 이 창의성 제로의 과정이라니. 원래 지금 나는 토마토를 중탕하고, 허브와 올리브유를 넣고 볶아내서 페이스트를 만들고, 해산물을 다시 볶고, 펜네 면을 또 다른 냄비에 끓여내는 아주 신나는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화가 난다 화가 나.


"맛있냐."

"움, 움, 꿀꺽. 응 맛있어. 짱이지."

"하..."

"왜요."

"아니, 어떻게 치오피노를 부대찌개로 받아?"

"오빠가 해준다며."

"아오 농담이지 하...내가 미쳤지 수달이(바깥양반 별명)한테 스팸 얘길 꺼내서."

"이상한 사람이야."


 냉장고에는 엄마와 장모님께서 틈만 나면 건네주시는 재료들이 한가득이다. 토마토도 먹지 않으면 상할 텐데, 그냥 디저트로나 먹어야겠다. 코스트코에서 사 온 새우도 아직 많이 남았고, 내가 이리 저리 채워놓은 다른 식재료도 많은데 언제 다 먹어치울지 고민이다. 하루 하루의 집밥에는 여러가지 고민이 재료의 수보다도 많이 섞여들어간다. 어떤 재료든 냉동보단 냉장이 좋다. 냉동에도 기한이 없지 않다. 오늘의 저녁밥을 내일의 아침에 어떻게 연결해야 품이 적게 들까 등. 요리를 좋아하고 즐기며 하는 일이라 스트레스 따위 없지만, 하고 싶은 요리를 하지 못해 힘은 빠진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스팸도 한통을 다 쓴 건 아니라서 빠른 시일 안에 먹어야 한다. 


"바깥양반."

"움, 움, 응?"

"스팸 좀 남았어."

"응."

"내일 아침?"

"당연!"


 내가 고민을 하든 말든, 스팸걸, 그 사랑은 식지 않아. 


 이 일이 있고 얼마 뒤에 역시 퇴근길에, 식자재 마트를 들렀는데 워낙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메뉴이니 가정상비약처럼 스팸을 좀 사려고 둘러보았다. 원산지에선 저렴한 식품의 대명사인데 어째서 이리 비싼건지, 다른 유사 제품들이랑 한참을 비교하며 어떤 햄을 살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파격 세일을 하는 제품을 하나 발견하고 성분표를 봤는데 웬걸, 오리지널 스팸보다 돼지고기 함량이 높거나 동일하다. 그런데 가격은 70% 수준이다. 국산 제품인데 마케팅이 잘 안되어 세일을 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치즈스팸과 갈릭스팸도 있어 오리지널 스팸보다 나아보였다. 종류별로 세개씩 사고 기분좋게 바깥양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일 아침 스팸이다.

-오. 웬일이징.

-마트 왔는데 세일하더라구.

-응 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알았어 너무 늦지 말고.


 다음날 아침에 나는 의기양양하게 스팸을 꺼내어 자르기 시작했다. 갈릭스팸이다. 바깥양반이 머리를 말리고 나서 나와서 같이 아침을 먹으며 나는 바깥양반에게 물었다.


"어때? 어제 산 건데."

"치 스팸 아니잖어."

"어- 아냐 진짜 스팸이야."

"맛이 달라."


 누가 속으랴만, 그러하다. 맛이 다르다. 스팸보다 훨씬 덜 짜고, 이건 마늘 성분이 들어가 향도 다르고, 결정적으로 제조공정의 차이 때문인지 스팸보다 탄성이 적다. 식감이 스팸과 두부의 중간 정도. 부드러운 질감이었다. 내 입맛에 맛이 없진 않지만 스팸을 사랑하시는 바깥양반의 입맛엔 썩 맘에 들지 않을지도.


"진짜 스팸이 좋지? 이것도 스팸이랑 돼지고기 함량도 똑같은데."

"아냐 진짜 스팸이 좋아. 그걸로 해줘."

"빡쳐!"


 스팸걸, 그 사랑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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