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애 VS 다 큰 애

아이를 아이답게 키워야 할까, 아니면?

by 공존

"경험의 원리"의 역설

아이의 미성숙을 성장과 발전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그러나 한가지 재미있는 역설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미성숙 꼭지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의 교육법이나 교수법은 아동의 실수, 즉 미성숙의 표출을 발달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인식하고 실수를 아무리 하더라도 다시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학부모를 독려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여러가지 체험을 시키기도 하고, 아예 아주 어릴 때부터 여러 방식으로 선행학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아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아동의 미성숙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부모는 그 결과에 대해서도 미성숙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의 학력발달에서 미성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이 말은 얼핏 굉장히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미성숙한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학부모는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행과제를 부여하곤 합니다. 경험은 그 자체로 아이의 발달에 기여하고, 미성숙한 아이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아동에게 부과되는 과제의 성격에 대해선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하죠. 게다가 선행경험은 후행경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린 아이일 수록 풍성한 경험을 조성해주어야할 것입니다. 풍부한 선행경험은 후행경험을 이끌어주고 아동의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받습니다. 여기에 한국적 교육열이 결합되면? 짠- 조기교육, 선행학습이 태어납니다. 아이의 설대를 잘라 발음을 좋게 만들고, 초등학생들에게 코딩을 가르치는, 전세계적으로 엘리트 지향적인 학부모들이 흔히 보이게 되는 교육방식이죠.


이런 교육기조는 1990년대 중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됩니다. 영어교육열풍이 불면서 조기교육, 영어유치원이 생겨났죠. 조기유학 바람과 함께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명문 유치원과 사립초등학교는 있었어도 조기교육에 그렇게 아이들을 밀어넣는 풍조까지는 아니었죠.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정답은 의외로 단순명쾌합니다. 1990년대 중반, 정확히는 1995년 5월 31일 김영삼 정부가 교육개혁정책을 발표했거든요. 열린학습 체계, 학습자 중심교육, 정보화 교육 등의 모토와 함께 아동의 발달단계에 대한 유연한 관점, 미성숙에 대한 보다 열린 관점이 우리 사회에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아동의 발달 단계에 대한 열린 생각으로 읽히는 듀이의 경험과 미성숙에 대한 관점이 오히려 조기교육의 이념적 배경이 된다는 것이 꽤나 이채롭죠. 실제로 그랬습니다. 미성숙에 대한 열린 사고는 아동의 생활세계를 성인의 그것과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동의 세계와 성인의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전제하고, 성인으로서 갖출 능력도 아이들이 성장단계에 맞게 발달시켜나가야 한다고 가정을 하죠. 같은 생각에서 선행학습이 이루어지고, 같은 생각에서 아동노동도 합리화되었습니다.

출처 : 월드비전

아이를 "아이의 세계"에 머무르도록 하지 않고 곧 도달할 성인의 세계의 방법론을 적용시키고, 그러한 생각이 경제논리에 결합된 결과입니다. 사진의 아이는 나이를 먹어서도 자기의 아이들과 함께 저런 노동을 계속하게 되겠죠. 영어 조기교육을 받은 우리 아이가 평생에 걸쳐 영어시험을 보아야만 하는 것 처럼요.


어린 아이를 어린 아이로 보는 시각

그래서 듀이의 경험의 원리, 성장의 원리를 보완하는 아동교육에 대한 관점이 요구됩니다. "눈높이 교육"이라고 불리는 방법이죠. 간단히 말해 듀이의 관점이 성인과 동등하게 아동을 존중하고, 충분한 경험을 보장함으로써 성장을 이끌어간다고 하면 아동중심의 교육은 아동의 관점으로 교육자가 다가가 아동의 수준에서 최대한의 경험과 배움을 얻어내도록 하는 관점입니다.


아동중심교육에서 당연히 선행학습은 지양됩니다. 미성숙한 아동의 발달단계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배움의 성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일까요? 네 아주 당연히 그런 측면이 고려됩니다만 아동중심교육의 철학엔 보다 깊은 성찰이 담겨있습니다. 선행학습 자체를 바로 성인의 욕망, 사회구조의 악덕으로 보는 시각인 것이죠.


<에밀>로 유명한 철학자 루소는 성선설과 유사한 관점으로 아동교육을 바라봤습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서민층의 극에 달한 빈곤을 루소가 생애과정에서 상당히 근접하게 경험한 것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빈곤으로 인하여 자신의 자식은 고아원에 보내면서도 장모와 처가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루소에게 현실의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질서는 그 자체로 타파해야 할 거악이었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아동이 자연상태의 순선함을 잃게 되는 것 역시 사회질서와 성인의 탐욕에 있다고 그는 바라보았지요.


때문에 루소는 아동의 본성을 해치는 모든 것을 경계했습니다. 심지어 교육에서도 일체의 인위를 배제하고자 했지요. 불평등한 사회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성인 교육자가 과연 올바르게 아동을 가르칠 수 있을까? 루소는 생각했고, 인위를 배제한 자연주의 교육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의 <에밀>은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을 뒤흔들게 됩니다.


알파고가 지식의 가치에 대한 인식마저 전환해놓은 이 때에 <에밀>과 같은 케케묵은 교육론을 거명하게 되는 것이 일면 아이러니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하는 교육억압이 과연 아동의 본성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아동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사회질서에서 그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에 기여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답은 대번에 나오죠?

일반적인 인식보다 훨씬 중요하고 선량했던 사람


어른의 활주로에 오른 아이들

이제 이야기의 시작으로 되돌아가, 우리 아이들이 홍보영상 제작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를 다시 보도록 하지요. 자아.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이 학교 홍보영상을 제작하고 그를 위해 전문 장비를 대여하고, 삼사일 밤을 새어 가며 영상 포맷을 두루두루 바꾸어가며 인코딩을 반복하고 더빙 믹스를 하고 편집을 했습니다. 이런 일을 왜 해야 할까요? 아이들의 성장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교육 상황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것이 진로적성에 따른 흥미를 현실에서 탐구해가며 지식의 본질에 다가서는 과정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학교 홍보라는 자극이 발생한 것이고, 아이들은 이 문제에서 최상의 교육적 경험을 얻어낸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는 이것이 무리한 선행학습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영상에 흥미가 있는 아동이 이 시기에 할 것은 적어도 인코딩과 편집은 아니지요. 당장 고화질 영상 편집을 위해서는 고성능의 PC가 요구됩니다. 이 시기에 영상에 흥미가 있는 아이들은 풍부한 고전 소설과 현대의 최신 영상 트렌드를 함께 익히며 미디어 리터러시와 창의성을 동시에 기르도록 할 수도 있겠지요. 안타깝게도 그런 지적 활동은 학생부종합전형에서 객관적인 지표로 관찰, 기록, 평가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이런 무리한 진로체험활동을 하는 것은 교육의 본래 목적보다는 어디까지나 현실과 절충된 결과물인 것입니다.

양육자, 교육자인 우리는 이미 아이들의 미래를 건 활주로에 올라서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 하루의 주행 거리에 따라 아이가 얼마나 높이, 또 멀리 날아오를 수 있느냐가 결정되죠. 당연히, 우리 등뒤에 매달린 아이들도 활주로에 이미 올라서 있는 셈입니다. 아이들은 양육자, 학부모들이 달리는 속력과 거리를 보며 언제쯤, 어느시점엔 내려와서 함께 달릴 것을 자연스럽게 요구받게 되겠죠. 그것이 우리가 처한 가장 큰 고민일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다큰애로 여기는 듀이의 관점이나 아이들을 어린아이로 바라보는 루소의 관점 모두를 두루 양육자와 교사들이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 테지요. 우리는 모두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맞바람이 불어서 당장은 비행기를 띄우기 어렵겠네요. 아이를 다시 등뒤에 올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한참 달리다 보니 등 뒤에서 순풍이 불어오는군요. 그리고 마침 내리막길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내려서 손을 잡고 함께 달려야 하겠지요. 아이의 두 팔과 다리가 비행에 적합하도록 쫙 펴지겠네요. 중요한 것은 둘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통합적 사고의 중요성과 분열적 사고의 위험성은 앞서서 <Dinning Etiquette>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날아올랐다가 휘청, 하고 땅에 내려앉을 때가 몇번이고 찾아올 것입니다. 그럴때 무사히 착륙할 수 있는 채비도, 반드시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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