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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02. 2021

<여신강림>과 신체적 탈코르셋, 자본의 기묘한 관계

새해 목표는 다이어트가 타당한듯

 TV 드라마로 다시 그려진 <여신강림>이 빼어난 미녀의 얼굴에 주근깨 몇개를 그려놓고 추녀라고 우기는 것을 본다. 예전 <미녀는 괴로워>에서도 배우의 목소리의 일관성이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몰입을 위하여  배우 김아중이 그대로 특수분장을 했었다. 미디어 속에서도 미남 미녀가 추남 추녀의 자리를 독식하는 상황은 <여신강림>이 외모는 나아질 수 있고 그때에는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흩뿌리는 것과는 정 반대로 외모지상주의라는 현실의 강고한 벽을 더욱 강화하는 기재로 작용하는 것을 환기한다. 코로나로 인하여 더더욱 좁아진 티끌만한 취업시장 속에서 외모의 값어치는 스펙을 넘어서 계급으로 기능하며, 외모가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자극하는 속성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한, 이는 소멸될 수 없는 현상이다.

 동시에 외모지상주의를 넘어서 <여신강림>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다양한 방식의 "아름다움"에의 욕망이 탈코르셋으로 명명된 근래의 여성해방의 한 조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아이러니를 목격한다. 화장을 지우고 유니섹스한 차림을 함으로써 그러한 외모지상주의와 외모의 계급화에 반대하는 해방의 몸부림은 여전히, 아니 길이길이 유효할 것이다. 인간은 화장을 한 채로 태어나지 않았으며 외모는 본인의 선택에 따라 부여된 특성도 아니고, 개인의 노력으로 발달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로 남성들로 구성된 권력집단은 끊임없이 여성을 외모를 기준으로 대상화하고, "꾸밈"을 강제한다. 꾸밈을 위하여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적은 수면시간과 여가시간을 강제당하고 일상생활 곳곳을 침범당한다.

 <여신강림>은 꾸밈을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는 18세(원작은 16세 중3) 소녀의 경험을 중심으로 화장품 산업체의 욕망을 더욱 확장하는 역할도 한다. 아무리 탈코르셋을 부르짓는다 한들, 광고를 통하여, 그리고 외모가 가장 중요한 자본인 연예인들을 통하여 "코르셋 자본"은 인간의 미의 기준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그렇게 형성된 외모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들은 부외자로 묶어 배척한다. 외모는 돈이 든다. 그리고 외모는 돈이 된다. 이 단순한 두자기 명제를 순환반복하여 화장품 산업체들은 더 많은 여성들에게 동일한 미적 가치와 꾸밈 비용에 대한 가치관을 부여한다. 그렇게 인간은 화장을 통하여 자본에 대한 종속을 강화한다.


 그러나 화장 전.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여신강림> 속 주경의 외모의 특성은 그 얼굴에만 있지 않다. 크게 돈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관리가 가능한 머릿결은 어마어마한 꾸밈 비용과 노동을 발생시킨다. 이는 미국과 같은 다인종 사회에서는 대부분 강한 곱슬머리를 타고나는 흑인들에게는 더욱 강한 억압으로 기능하며,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겠다며 곱슬머리를 계속 지키는 셀러브리티들도 있다. 그리고 작중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것으로 묘사가 되지 않는 골격과 몸매가 있다. 그나마 열성적으로 비용을 투자한다면 극복이 가능한 모발과 다르게 골격은 얼굴 몇군데를 제외하면 교정이 불가능하다. 이는 외모 경쟁을 강제당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장애로 작용한다. 외모는 이처럼 인종, 성별과 유사한 계층화의 매개다.


 때문에 몸매와 체형이 탈코르셋의 핵심 투쟁 대상이 된다. 애초에 "코르셋"이라는 명명 자체가 여성의 체형에 대한 강박과 구속에의 반감으로부터 온 것이며,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고 일반화된 화장보다는 훨씬 뜨거운 여성해방의 주제다. 현대 사회에서 몸매와 체중의 문제는 평생 인간을, 특히 여성을 이상화된 몸매에 고정시켜 거기에서 벗어난 여성을 "비만"이라고 묶은 뒤 온갖 비평을 가한다. 날씬하지 못한 여성은 남성에 의해 여성의 지위를 박탈당하며 그 위에 나태함과 통제력 부족의 이미지를 가공당한다.체형과 직무능력의 연관성을 밝히기 어려운 노동 영역에서 비만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노동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외모로 인한 차별의 명백한 증거다.


 비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비만은 실제로 나태와 통제력의 부족을 의미할까? 이미 절판된 책 <비만의 제국>에서는 그런 대중의 인식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폭주로 빚어낸 현대사회의 비만 문제를 바로보지 못한 그릇된 시각에서 온다고 보았다. 미국 농축산업계과 식품산업계는 각종 입법로비를 통해 자신들의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시켰고, 팜유와 합성당류로 대표되는 20세기 식품가공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눈부신 혜택을 그들에게 안겼다. 대표적인 것이 식당과 가공식품의 "1회 제공량"인데, 책에 따르면 1960년대의 미국인의 1회 식사 섭취량은 다른 나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은 미국인은 매 끼니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사량과 칼로리를 섭취하고 있다. 미국의 학교급식은 패스트푸드로 난장판이 되어갔고 비만을 점차 합리화하는 다양한 이론과 보고서들이 등장했다.


 현대의 비만은 자본주의와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인 셈이다. 몇가지 비만의 2차 비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비만인 사람은 별도의 건강비용을 지출한다. 다이어트산업과 관련의료사업의 수익은 비만인의 증가에 강력한 동기를 갖는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이어트산업계와 의료산업계가 함께 공모해서 비만인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식품산업계와 공모를 통해서. 다이어트산업계와 의료산업계가 국민의 건강을 위한 입법촉구를 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정책을 입안할 동력을 찾지 못한다. 오히려 법인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기부금을 받는 정치인들이 비만을 증가시킬 수 있는 식품정책을 입안하면, 곧 식품산업, 다이어트산업, 의료산업 모두의 수익은 증가한다. 이것이 미국에서 실제로 수십년간 발생해 온 일이다.


 이거은 재미있는 역설이다. 현대인의 비만은 자본주의의 확대와 강력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 삼성을 만든 밑바탕엔 1950년대 제일제당의 설탕사업이 자리한다. 설탕은 20세기의 가장 막강한 상품 중 하나다. 자본주의와 정치의 결탁으로 미국에서는 사회적 질병 수준으로 비만이 확산되었고, 그리고 너무나 일반화된 나머지 비만이 합리화된 것을 넘어서서 지금,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선 탈코르셋, "우리의 뚱뚱한 삶을 살 권리"를 주장한다.


 비만할 권리는 여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가? 단언컨데 조금도 그렇지 않다. 아름다움에 비용이 들듯이 비만에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이 바로 비만이 늘어나는 이유이며 관련산업계의 욕망이고 수익이고, 최종적인 목표다. 비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여성의 해방이 아닌 구속의 연장일 뿐이다. 과연 비만할 권리를 주장하는 탈코르셋 운동가들을 바라보는 산업자본가들의 시선은 어떨까? 다이어트와 의료사업계가 식품산업계와 공모하듯, 이들이 활동가들의 후원금을 지급함으로써 비만할 권리의 확대를 기대하며 웃음짓는 모습 또한 조금도 허무맹랑하지 않다.


 종합하자면 탈코르셋 운동의 경우, 화장품으로부터의 해방과 비만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타당해보인다. 여성의 피억압 지위 자체가 자본주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여성운동과 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따라서 비만을 긍정하는 메세지보다는 차별 자체를 철폐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간에 외모를 고리로 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비만이 자본의 욕망이 드리워진 것인 이상은 비만 자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즉, 사회체육을 증진하고 가공식품보다는 천연식품을 촉진하고, 외모로 인한 차별을 막을 정책을 법제화해야 한다. 일례로 대중교통이 터무니없이 비싼 북유럽 일부 선진국의 경우 자전거 사용이 굉장히 일상화되어 있고, 사회체육시설과 피트니트 센터가 굉장히 흔하게 설치되어 있다.

 자본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퍼져있는 권력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 작동을 인식하는 것은 어렵고, 거기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기란 더욱 어렵다. 그 탓에 잘못된 판단과 반응을 도출하기 쉽다. TV에선 여전히, 화장품에 대한 광고가 넘쳐나고 미의 기준은 왜곡되어 있다. 반대로, 비만의 문제는 철저히 은폐되고 개인의 문제로 오도되고, 비만과 외모차별이 동시에 합리화된다. 여성과, 모든 인류의 자유의 진전을 위해서 더 적게 먹고 더 자주 움직이는 삶으로의 진전을 우리가 상상해보는 것이 마땅할 터다. 날씬한 삶을 살 권리. 충분한 여가, 공동체 프로그램, 비판적 교육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왜 꼭 좋다 싶은 책은 절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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