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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02. 2021

지리산에서 군고구마로 차 우려마신 사연

뭔가 마시지 않기엔 너무 아름다운 뷰였어

"아 핫초코 따끈한 거 한잔 마시면 딱 좋겠고만."

"아 내가 왜 커피 세트를 안가지고 왔지. 후회가 된다."


 바깥양반과 나는 지리산의 설경을 보며 나란히 앉아 각자 푸념을 토해냈다. 새해 첫날을 보내기 위해 내려온 여행, 바깥양반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사회와 거리두기를 혼동한듯한 산 중턱의 독채펜션에 방을 잡았고 그곳은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쉬고 가기에 좋은 곳이었지만...차를 한잔 하지 않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커피가 땡겼고 바깥양반은 핫코초를 원하고 있었다.


"커피 내리는 거 왜 안챙겨왔어? 맨날 들고 다녔잖아."

"끄응...내가 셀프로 중독 통제장치가 있어서...그러는 너는 왜 핫초코 믹스 안가져왔어. 일부러 사다놓고는."

"아 맞네. 챙길걸."


 이번 여행에 마침 커피 드립 세트를 안가져왔다. 바깥양반도 핫초코 믹스를 안가져왔다. 내 쪽의 이유는 최근 커피에 지나치게 빠져있다는 반성이었다. 12월 30일에 한시간 가량 커피를 볶았다. 작은 냄비에 볶는 거다 보니 한번에 볶는 양이 많지 않아서 커피를 볶고 식히고 볶고 식히고 그것을 섞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시간이 한참 들어갔다. 그렇게 볶은 콩들을 밀폐용기에 담고는, 이번 연휴가 끝날 때까지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커피가 숙성이 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런 와중이니, 내가 여행 다니는 곳마다 커피를 내려먹는 것에 대해서 조금쯤은 자제하는 마음이 들게 된 것이다. 짐을 챙기며 커피 말고 다른 차 종류라도 챙길까 하다가 그만 짐이 많아 잊어버렸다. 바깥양반 쪽은, 단순히 까먹은듯하다.


 1월 1일부터 함박눈이 내린 터라 지리산을 마주한 작은 숙소는 길이 꽁꽁 얼어있다. 말 그대로 꽁꽁 얼어서, 어제 언덕을 오르는데 차 바퀴가 헛돌았다. 주변에 가장 가까운 슈퍼도 10km 이상 떨어져있다. 그러니 커피를 사온다거나 하는 선택지도 이내 지워졌다. 방법은 없다. 마음을 비우고 망망한 산을 그저 바라보며 맹물과 다른 주전부리를 먹을 수 밖에. 다행히 보일러가 방바닥을 따끈하게 덮혀주면서 이내 바깥양반과 나는 차 욕심을 잊어버리고 늘어지게 누워서 TV를 보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이 되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오후의 풍경보다 더욱 아름다운 아침햇살 속에 지리산의 설경은 빛이 나고 마침 주변에 눈도 조금 더 내렸다. 창 밖은 온통 흰 빛인데 우리에게 커피와 차가 없다는 것은, 마치 밥상에 수저가 없는 느낌이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나는 내내 고민을 했다. 차, 커피, 뭔가, 뜨거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저 뜨겁게 물을 끓여마시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속에서 나는 갈망했다.


 그러다가 어제 구워먹고 딱 하나가 남은, 군고구마를 떠올렸다. 아, 얘로 차를 만들면 되겠구나.  

 고기와 함께 구워먹기 위해 산 고구마호박 아니 호구마 아니 호박고구마. 네개를 구워서 그중 하나가 아직 남아있다. 줄기가 좍좍 찢어질만큼 푹 익진 않았지만 덕분에 군고구마의 매케한 탄내도 나지 않았다. 새옹지마다. 살살 껍질을 벗기며 조금 맛을 봤는데, 달콤한 맛이 그만이다. 포트에 물을 끓이며 컵들을 챙겨 싱크대에 늘어놨다. 고구마 껍질을 벗긴 뒤에 숟가락으로 잘라내서 컵 하나에 담았다. 그리고 팔팔 끓는 물을 컵에 반쯤 붓고 숟가락으로 마구 치대며 뒤섞었다. 이내 고구마가 부서지면서 노란 죽처럼 변했다. 숟가락으로 조금 떠먹어서 맛을 보고는 "킥"하고 웃으며 바깥양반에게 말을 걸었다.


"바깥양반. 빨리 일어나.내가 지금 뭐 만드는지 아니?"

"우웅? 뭔데."

"기대하렴 요녀석."

 

 대강 성공인 것 같아 고구마를 더 벗겨서 한 숟갈 더 잘라냈다. 다시 힘을 줘서 숟가락을 마구 놀리며 창밖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이다. 여기서 커피를 마셨다면 더욱 좋겠지만, 1월 1일이라고 너무 마음이 한가했던 것 같다. 다음엔 어딜 가든 커피와 용품들을 들고 다녀야겠다 생각을 했다. 요즘 볶는 커피들이 더욱 맛이 좋다. 솜씨가 는 것이다.  


"바깥양반. 이거 먹어봐 어서."

"뭐야 이게...푸흡, 아하하하 진짜 웃겨."


 나는 고구마죽을 따로 조금 머그잔에 붓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바깥양반에게 컵을 내밀었다.  비스듬하게 누워 창밖을 보며 산멍을 때리던 바깥양반은 한모금 고구마차를 마셔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고구마야?"

"어 어제 남아서."


 나는 글을 마저 쓰기 위해서 바깥양반에게만 한잔 만들어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물론, 나도 고구마차를 마실 계획은 있었다. 말끔하게 씻고, 자리를 정리하고, 차에 짐을 모두 넣은 뒤, 숙소를 떠나기 직전에.

 우리는 아침에 김밥과 슈크림빵에 마들렌 등, 집콕 휴일을 보내기 위해 바리바리 사온 간식들로 아침을 떼우고 나서 씻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가득 머리에 부으며 여전히 커피를 그리워했지만 지리산 설경을 보며 수제고구마차를 마시는 일도 즐겁기만 할 것 같았다. 짐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마쳤다. 그리고 바깥양반을 재촉하며 미리 포트에 물을 팔팔 끓였다. 원래 바깥양반은 뜨거운 것을 잘 마시지 못해서 중간 정도 온도로 차를 내어주는데, 밖은 춥다. 그리고 산과 설경을 감상할 시간은 길다. 완벽하게 준비를 마치길 기다려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펜션 앞마당 정자에 앉았다.


 1월 2일의 오전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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