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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05. 2021

비극

광기에 의해 짓밟힌 보편적 특권


비극

명사

(1) 매우 슬프고 비참한 일이나 사건.

(2)  (기본의미) [연극]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제재로 하여 주인공의 패배, 파멸, 죽음 따위의 결말을 갖는 극 형식.


 아직까지 최악의 해상재난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타이타닉호의 사망자 통계에는 한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바로 아동의 사망율로서 109명 중에 53명, 딱 반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다. 전체 남성의 80%가 사망하는 동안 여성은 단 26%가 사망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동이라면 구조선의 성인 한명 분의 공간에 두명 세명 우겨넣어서라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한가지 더 의미심장한 통계는 1,2,3등석 별로 아동의 사망자 규모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1등실의 아동은 6명 중 단 한명이 사망했다. 2등실의 어린이 24명은 놀랍게도 전원 생존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3등실의 어린아이 79명 중 52명이 사망했다. 3등실의 어린아이들이 아동 사망율의 전체 통계를 좌우했다.


 타이타닉 호의 아동 사망율 통계로써 얻어낼 수 있는 시사점은 두가지다. 첫째는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덮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2등실의 어린이가 전원 구조될 동안 3등실의 아이는 2/3가 사망했다. 2등실의 승객은 주로 중산층이었고, 타이타닉 호가 당시에 최신 크루즈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른 여객선의 1등실에 준하는 시설에 견줄만했다고 한다. 당연히 타이타닉의 2등실 승객은 다른 배의 1등실 승객에 비하는 소득수준이었을 것이다. 반면 3등실의 승객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주 목적으로 배에 오른 빈곤층이 다수였다. 다른 여객선보다 상당히 좋은 대우라고는 하지만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배의 아래쪽, 침몰사태가 발생했을 때 가장 생명의 위협에 취약한 구역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이 갇혀있던 곳이다.


 모든 객실에서 남성의 사망율이 60%를 넘겼지만 여성의 경우 1등실 여성의 사망율은 단 3%. 극도의 패닉 상황에서도 인간의 의지로서 레이디퍼스트의 원칙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3등실의 경우 여성의 사망율이 50%를 넘어간다. 1등실에서 단 4명의 여성이 죽는 동안 3등실에선 154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재난은 이토록 보편적이지 않다. 그렇게, 인간의 원칙은 빛을 잃었다. 다시 위에서 인용한 통계처럼 1등실 아동이 단 1명 사망할 때 3등실의 아동은 무려 52명이 사망했다.


 두번째 시사점은 3등실 아동의 사망율을 감안하더라도 전체 아동의 사망율이 49%다. 지나치게 높다고, 누구나 느낄만한 수치다. 타이타닉은 빙하와 충돌하고 단 두시간반만에 완전침몰했다. 타이타닉의 승객들은 선원들의 통제에 원만하게 따랐다고 한다. 동시에 선원들은 여러 침몰사고를 통해 정비된 수칙에 의거해 여성과 아동 우선의 구조원칙을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타닉호에는 선원들의 구조활동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여러 제약요소들이 있었다. 구명정은 정원의 절반, 미국으로의 이주를 목적으로 한 외국인들에겐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3등실은 배의 하부인 탓에 침수에 먼저 피해를 받았고 갑판과의 거리는 멀었으며, 그만큼 구조인력의 손이 미치지 못했다. 아동과 여성 먼저라는 원칙은 특히 배의 가장 아래칸, 3등객실에는 별세계의 목소리였다.


 2021년 신년 벽두에 SBS에서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 속 아동학대의 참상은 타이타닉호의 3등실 아동들을 떠올리게 한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향하는 삶은 인간사회 속 3등 객실과 같다. 복잡한 복도, 좁은 객실, 구조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우며, 재난에는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다. 인간 사회는 공평 공정하지 않으며, 아동과 여성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모두에게 반드시 관철될 것을 기대하긴 어렵다. 3등 객실의 아동은 1등 객실의 아동의 목숨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타이타닉호 참사와 "정인이 사건"은 보여준다.


 또한 인간의 광기에 우리가 얼마나 근접한지도 쉽게 알 수 있다. 미쉘 푸코는 <광기에 역사>에서 현대문명이 정립되며 이성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를 16~17세기의 풍경으로부터 세밀하게 계보학적으로 추적했다. 이성이 확립되지 않았던 구시대에는 광기와 비이성, 비정상성을 대중이 구분하지 못했다. 광인과 이상성욕자들이 한 공동체에 그럭저럭 함께 살았다. 이성의 진보가 이뤄지면서 먼저 광인이 정상성과 구분되고, 그 다음으로는 지능이 구분되고, 성정체성이 구분되며 차츰 인간의 정상범주가 세밀하게 이뤄졌다.


 물론, 이성은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단지 범주화하지 않고 양자의 보편적 권리를 함께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럼으로 인하여, 현대사회는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이 혼재된 무저갱의 혼돈과 같다. 전세계의 빈민을 모두 먹여살릴만큼의 식품이 생산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정치적 이유, 경제적 이유로 마땅히 돌아갈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폐기되고 만다. 인간은 단지 가상의 개념인 신용화폐의 축적을 위해, 그 숫자에 쓰인 수만큼의 사람의 목숨에도 관심이 없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그 가치를 소멸시키는 일에 이토록 무심한 세상에, 3등실의 아이들의 삶이나 정인이의 삶이나 마땅히 보호받는 일은 가능할까. 그러니까, 현대사회는 순항중인 타이타닉이 아닌, 침몰중인 그 배와 같은 항구적인 혼란의 상태다. 이익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정해지고 우연한 기회와 태생으로 구분된 객실에 따라 삶이 보장되고 말고가 가려진다. 그 안에, 정인이는 그렇게 가라앉았다.


 한가지, 타이타닉호와 정인이 사건의 유사점은 구조신호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타이타닉호는 무수히 많은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나 항로의 주변 선적들은 모두 그것을 파티나 경고신호로 인식했다고 한다. 정인이 사건에서는 여러차례 주변인들이 구조신호를 경찰에 알렸으나, 경찰은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경찰이 왜 그 신호를 알아보지 못했는가 하는 예단은 접어두고서라도 타이타닉 참사 이후 해상에서의 신호탄은 무조건 구조신호로 인식되도록 규칙의 정비가 있었다고 한다. 책임은 책임대로 물리고, 다시는 정인이와 같은 불행한 생명이 없도록 "무조건"이라는 우리 사회의 원칙으로의 나아감은, 마땅히 요구해야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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