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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11. 2021

절차탁마

이 아름다운 배움의 대화란!


명사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논어의 1장인 <학이>편에는 공자의 제자들 중 흔히 말하는 "엄친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 자공과의 흥미로운 대화가 실려있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아첨하지 않으며[貧而無諂]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은 것은[富而無驕] 어떻습니까? " 


공자가 답한다. "좋다. 그러나 가난하면서 도를 즐기고[貧而樂道]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 [富而好禮]." 


그에 자공이 다시 물었다. "시경(詩經)에 '깎는 것 같이, 쪼는 것 같이(如切如磋), 갈아내는 것 같이, 닦아내는 것 같이(如琢如磨)'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이제 너와 함께 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로다."


 우리에겐 너무 흔한 고사성어인 절차탁마이지만 논어에 실린 이 구절에는, 배움의 아름다움과 스승과 제자의 교감이 그대로 담겨있어 무엇보다도 공부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대화의 전반부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라는, 이 또한 오늘날에 흔하게 알려진 논어의 다른 구절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가난하더라도 아첨하지 않는것,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것은 그 이상의, 도를 즐기고 예를 좋아하는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다. 알아주는 엄친아이지만 한계를 드러낸 자공의 질문에 대하여 공자는, 부드럽게 한단계 위를 보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자공은 역시 공자의 가장 탁월한 제자답게 이내 스승의 뜻을 알아차리고, 시경의 구절인 여절여차 여탁여마를 인용하여 되묻는다. 전체 구절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象牙)를 잘라서 줄로 간 것[切磋]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硏磨]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라고 풀이된다. 군자, 상아, 옥은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물이지만, 그 과정은 모두 지리한 수양의 과정, 수천 수만번을 쪼아내고 닦아내야 하는 인내의 과정을 거친다. 


 자공은 왜 하필이면 "절차탁마"를 인용할 생각을 했을까?  자공은 좋아하는 단계에서 즐기는 단계로 이르는 배움의 길을 "깎는 것 같고 쪼는 것 같고 갈아내는 것 같고 닦아내는 것 같은" 인내의 과정, 지루할 수 있는 고행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실로 그렇다. 공부에는, 배움에는, 절차탁마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든 즐기는 사람이든, 알고자 하는 사람이든 그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 그것을 다른 이, 다른 예와 비추어보는 수 밖에 없다. 자공은 스승의 조언을 토대로 즉시 혜안을 발휘하여 "배움을 좋아하는 경지"를 "끝없는 공부의 길"로 연결해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공은 "엄친아"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은 언변이면 언변, 정치면 정치, 상재면 상재까지 그야말로 재능으로 똘똘뭉친 당대의 천재였단 것이다. 워낙 머리가 비상하여 오히려 교만에 빠질까 경계하여 공자는 자주 그의 언변을 꾸짖었다. 그리고 공자의 밑에서 학문을 마친 뒤에 재상 벼슬을 하며 장사로 재산을 축적하여, 공자의 천하주유를 후원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절차탁마"하는 공부벌레와는 정 반대의 유형이다. 다만 심성이 올바르고 따듯하였으며 공자를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런 자공이 시경을 읽고 이처럼 "깎는 것 같고 쪼는 것 같고 갈아내는 것 같고 닦아내는 것 같은" 길을 배움의 깊은 경지에 이르는 방편으로 짚어내자, 공자는 뜻밖이면서도 무척이나 기뻤던듯하다. 공자의 마지막 응답에는 제자의 성장을 기뻐하는 감정이 가득 묻어난다. 안회처럼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인물에는 미치지 못하나, 자공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볼 수 있고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아는 인물. 이렇게 제자를 칭찬하는 구절이 논어에 흔하지 않다. 


 절차탁마에는 이처럼 배움으로 향하는 고되지만 간명한 진리의 길과, 그 길을 바라보는 제자와 스승의 시각, 그리고 그것이 교차하는 순간의 기쁨이 그대로 드러난다. 내막을 알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구절인데 절차탁마라는 말이 담고 있는 그 자체의 뜻이나, 실제로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이 말이 튀어나오는 때가 그리 흥미진진한 상황이 아니다. "절차탁마하십시오."라는 말은 얼마나 지긋지긋한 충고인가. 


 오히려 그래서 더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절차탁마는 지루하게 반복 또 반복하는 과정이 아니라 공부를 좋아하게 되고 공부를 즐기게 되는 경지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자공이 공자와의 대화를 통해 한단계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듯 매 순간 새로운 경지를 마주하며, 더 넓은 이치를 깨우치고,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내일이 길고 길었던 2020학년도의 마지막 날이다. 1년간 함께 한 모든 아이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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