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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26. 2021

어느 사무직의 기묘한 취미

캘리그라피 애호가에게 이면지란

 

스윽스윽 글씨를 쓴다. 이따금 시간이 나면 생각을 정리하며 연습하는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는 좋은 취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면 딱 좋다. SNS의 홍수 속에서도 먹방이나 여행보다 오히려 희소하고 그래서 권위가 부여된다. 남들이 하는대로 단순히 따라하는 것과, 상당한 노동력과 시간을 투자해 자신의 재능을 다듬는 것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도 않는다. 이따금 밤이면 거실에 앉아서 글씨 연습을 한다. 옆에서 아내는 누워서 드라마에 집중한다. 책을 읽을 때면 아내가 드라마를 보며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기 어렵다. 그래나 캘리그라피는, 언제든 귀를 열어둘 수 있고, 또 내키면 내가 폰으로 다른 프로그램이나 음악을 들으면서도 얼마든 가능하니, 알뜰살뜰 재미난 활동이다.


 나는 원래 빼어난 악필이었다. 글씨를 못쓰는데다가 연필을 쥐는 방법도 조금 이상했다. 엄지손가락이 남보다 조금 짧은 편이라 연필 앞쪽으로 모아지지 않고, 주먹을 쥐듯 엄지손가락이 검지 조금 안쪽으로 말려들어간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눌러쓰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내 여러가지 면모가 그러했듯 누가 보더라도 조금 덜떨어져 보이는 모습이었다. 몸은 푹 수그리고, 연필 잡은 손은 주먹쥐기에 가깝고, 게다가 글씨는 지렁이를 닮았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차시며 "글씨가 곧 얼굴이다."라며 자주 혼내셨는데 놀랍게도 나는 무려 성인이 되어서 그 버릇을 고치고야 만다. 두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는 대학생 때 학생회에서 대자보를 쓰는 일을 주로 했다. 그림 실력과 창의력으로 눈에 띄는 대자보를 좍좍 뽑아는 냈지만, 대자보의 본질은 그 메세지에 있으니, 못쓴 글씨로는 학생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대에 가기 전에 대자보를 쓰며 글씨가 조금 사람에 가까워졌다.


 군대에 들어가선 아예 작정하고 글씨를 고칠 수가 있었다. 군인하면 편지, 군인하면 수양록, 행정병이면 서류. 2년간 종이를 접할 일, 쓸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작정하고 글씨를 고치기로 했다. 행정병이었으므로 업무수첩을 하나 받았는데, 수양록과 노트를 연습장 삼아 빼곡하게 글씨를 채우며 고쳐나갔다. 아버지는 자주 편지를 보내주셨다. 가진 건 없어도 자식 사랑만은 넘쳤던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에서 고생을 하는데 당신께서 에어컨을 틀 수는 없다며 여름 내내 차에서 땀을 뺀다는 이야기를 담으셨다. 나는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께 편지를 씀에 있어 그 못난 글씨를 보여드릴 수가 없어서, 꾸준히 글씨연습을 하면서 꾸준히 더 나은 글씨를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 담았다. 덕분에 제대할 무렵엔 상전벽해로 이전과 글씨는 달라져 있었다.

입대 초
전역 직전

 글씨 연습을 하는 습관이 캘리그라피로 한발짝 더 올라선 건 2013년이니 벌써 8년, 조만간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당시 고3 담임을 처음 하는 팔팔한 청년이었던 나는 졸업식을 앞두고 우리 못난이들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마침 그보다 몇달 전 TV에서 방영한 캘리그라피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났다. 글씨! 좋은 선물이지. 나는 당장 미술선생님께 달려가 세필붓과 먹물을 빌려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몇시간이고 글씨를 썼다. 수능이 끝난 고3 담임이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시기라 가능했다.


 대망의 졸업식날에 나는 졸업장에 하나 하나 내가 써 준, 당시로는 참으로 허접했던 글씨 쪽지들을 꼽아주었다. 아이들은 아무리 엉터리여도 원래 이렇게 자기를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존재라서 내 개발괴발한 글씨를 기쁘게 받아주었다.


 그 후로도 나는 심심하면, 시간이 나면 캘리그라피 혹은 글씨 연습을 하곤 한다. 원고지 노트를 좋아한다. 원고지 노트를 쓸 때는 사각형의 칸을 인지하며 보다 예쁘게 글씨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이면지를 좋아한다. 사무직에게는 폐기할 이면지라는, 마음껏 글씨연습을 하고 버릴 수 있는 재료를 무한정 얻을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 특히 교사에게는 더욱 그렇다. 매년 반드시 폐기해야 하는 문서, 양면 복사를 하기도 난감한 문서들이 A4용지 큰 박스 하나들이 정도가 나온다. 특히 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재작년까진 전체 담임학급 학생들에게 생활기록부를 뽑아서 확인시켜준 뒤 바로 폐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폐기문서를 들고서 흡족하게 손을 놀리곤 했다. 양면복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 누군가는 묻겠지만 학교에 들어오는 사무용 프린터는 양면복사를 할 시에 수명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담임이 아닌, 그리고 생기부 출력 확인이 금지된 지금도 그렇다. 각종 결재문서, 수업자료 등으로 이면지는 차고 넘친다. 특히 전화번호나 서명이 찍혀 있어 이면지 활용이 불가능한 문서들이 나의 취미생활의 재료가 된다. "열나게" 일을 하고 나서는 한번 숨을 고르며 이면지 더미에서 종이를 고른다. 종이가 넘치는 세상에 사람들은 이면지를 조심스럽게 이면지 함에 넣지 않는다. 대충 마구 던져넣어 구겨진 아이들, 출력에 활용되기 어려울법한 종이들을 골라낸다. 이면지를 고르는 과정이 내 취미생활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서너장 정도를 골라서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대강 2,30분 정도 글씨를 쓰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연습이 필요한 일이, 연습 자체가 취미이니 당연히 쓸모가 많다. 당장 직장 내에서 이따금 요청이 들어온다. 그러면 이면지에 몇번 연습을 한 뒤에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로 간단히 작업을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컨버젼도 쉬운 일이 된 세상. 아니면, 어딜 가서든 방명록을 쓸 때 캘리그라피를 해버릴 수 있다. 몇해 전 가을 철에 공주에 갔는데, 조용한 한옥 찻집에 방명록 노트가 있길래 펜을 꺼내 연습도 없이 휙 썼다.

 물론 연습이 취미이기 때문에 나쁜 점이 몇가지 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퍽 잡아먹는다. 한창 캘리그라피 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연습을 하던 2014년엔 세시간을 내리 앉아서 글씨만 쓴 적도 있다. 그런데 이게 충분한 연습량도 아니다. 두번째 나쁜 점은 연습 자체에 오래 걸리는데 안하면 실력이 감퇴한다는 점이다. 군대에서 열심히 고친 필체도, 한두해 동안 열심히 했던 캘리그라피도 한동안 손을 놓았더니 다시 개발괴발의 원래 상태에 근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놈의 이면지가 문제다. 부서 이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꺼번에 서류를 폐기해야 하는데, 재활용 가능한 이면지는 이면지함에 넣고, 세절해서 바려야 하는 종이들은 당장 버리지 못한다. 먼저 작년에 쓰던 업무수첩의 남은 종이들. 아깝다. 뜯어낸다. 교장선생님의 인장이 들어가 있는 문서, 뽑아낸다.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들어가 있는 문서들도 물론 빼낸다. 아깝다. 이 종이들 모두 연습에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지경이니 연습장이며 이면지 묶음이 하염없이 쌓인다. 그런데 또 나중 가면 어지간히 소모는 되니 냉정하게 모두 세절기로 보내지도 못한다. 그렇게 세절해야 할 이면지를 쌓고 쌓다보니 몇해 전 학생들이 낸 진료확인서며 봉사활동확인서가 내 이면지묶음에 남아있기도 하다. 벌써 전역을 한 아이들도 있고, 몇년간 연락 한통 없는 아이들의 흔적을 글씨 연습 중에 발견하면 반갑고 궁금하기도 하다. 사용 뒤엔 다시 종이를 구분해서 버려야 하니 혹시라도 종이의 내용은 모두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 발견학 되는 그때의 나. 그때의 시간들.


 오늘도 열댓장의 종이를 이면지묶음에 합쳤다. 지나치게 두껍게 쌓이기 전에 글씨연습이든 단어공부든 해서 써야겠다. 그런데 자리 뒤에는 내 담당업무인 전체 학생의 생기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선생님들의 점검 결과를 종합하기 위해 내가 모두 받아서 모아두었다. 이 분량을 모두 내가 쌓아둘 순 없고 후딱 처리를 해서 모두 폐기해야겠다.


 사무직이라서 혼자서 즐기기 좋은 취미지만, 아무래도 시간을 충분히 투자하기 어려운 활동. 오늘 처음 앉은 새 자리인데 책상 위에 떡하니 이면지 뭉치라니. 누구에게 핀잔 듣기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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