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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09. 2021

제가 조퇴라서 커피 내려드리고 갑니다

새 학기 새 자리 새 생두 새 사람들

 학교는 온통 공사중이다. 온라인 수업으로 등교하는 학생도 줄어들었겠다, 낡은 시설과 어지러운 교무실들을 싹 묶어 정리한다고 시끌벅적이다. 겨울방학 내 이어지던 공사는 거의 마무리되어, 개학 후 2주간 1/3 등교 체제가 끝나면 조금 더 쾌적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참에 나도 교무실을 옮겼다. 새 부서가 생기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많이 받았다. 여전히 업무량은 많지만 홀가분하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두개의 부서, 5명이 함께 생활하는 작은 교무실이 내 새 터전이 되었고, 나는 어김없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세팅을 했다. 대략 교무실의 홈카페 3호점 정도 되려나. 작은 교무실이라 냉온수기도 없고, 배수시설도 없어 컵과 커피용구들을 헹구려면 일이 제법 되지만 내 책상 바로 옆이라서 편한 점도 있다. 지금까지 학교에 차린 내 홈카페들은 내 자리와 멀어서 오고 가는 것도 일이었다. 

 자리가 잡혔으니 이제 교무실을 같이 쓰는 선생님들의 동태를 파악할 차례다. 같은 교무실을 쓰는 나 빼고 네 사람 중 한명은 원두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두분은 하루 한잔 정도. 한분은 한잔 플러스. 이정도면 원두를 볶는 부담도 크게 없겠다. 그라인더로 원두를 윙윙 갈면서 커피 의향을 물으니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는, 자기도 원두를 좀 챙겨오시겠다고 한다.


"선생님은 어디서 사세요 원두?"

"마트에서 사죠 허허."

"아아...저는 볶아서요 집에서."

"네? 볶으세요? 따로 배우셨어요?"


 음 그건 아니고. 이리 저리 볶아 먹게 된 사정을 대강 설명하며 커피를 건냈다. 생두를 사서 볶으면 한잔에 백원에서 이백원. 하루에 세잔을 대접해도 오백원이면 떨어진다. 아예 학교에서 볶을까 싶기도 한데 그건 아무래도 꼴볼견이다. 선생님은 커피 껍질은 어떻게 처리하냐는 등, 여러가지를 내게 물었다. 이분도 나랑 좀 기질이 비슷하신듯한데,


 그런 예상은 다음날 스콘으로 돌아왔다. 댁에서 아내분과 함께 구우신 거라고. 덩치도 나보다 조금 큰 체육선생님께서 스콘이라니. 다만 수분 조절은 잘못한듯, 속에서 뭉친 식감이 느껴졌다. 나는 스콘을 먹으며 드립용 작은 주전자에 베이킹소다를 붓고 삭삭 닦았다. 한동안 집에서는 에스프레소만 빼먹었더니, 그 사이 녹이 조금 슬어 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녹을 긁어내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붓고 하며 하루 내 공강시간 마다 팔이 빠져라 닦았더니 다행히 녹은 다 제거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게 뭐든 이렇다.

"샘샘. 요즘도 콩 볶아요?"

"네...어제 6만원치 샀어요."

"헤엑. 6만원이면 얼마?"

"4키로그램요."

"헐 나 이번에 아는 분께 콩을 좀 받았는데, 다크로스팅같은데 엄청 공기가 빵빵하더라구요. 원래 그래요?"

"어...그러니까 밀봉되어서 왔는데 그게 빵빵하단 거죠?"

"네네."

"아 그건 볶고 가스를 안빼서 그런듯?"


 내가 부담임으로서 모시는 담임학급 선생님과는, 남편께서 역시 집에서 내려 먹는 커피에 맛을 들이셔서 내가 작년부터 커피를 좀 나눠드리는 등 커피로 이야기를 두루 나눈다. 아무때나 커피를 내려드리고 하니 생두를 사서 내게 준 일도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커피콩에 대해서 묻더니 오늘 500그램 가까이 되는 큰 봉투를 하나 내민다. 쌔카맣게 강배전된 원두가 밀봉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개학 일주일만에 벌써 여러가지 콩들이 모였다. 르완다 원두, 에티오피아와 케냐를 섞은 원두, 코케허니 등. 대강 먼저 볶은 원두들부터 소비하는데, 처음엔 날짜도 적어가며 관리를 했지만 홈카페에 그런 유난은 낭비 같아서 그만 두었다. 


 일전에는 이우학교에서 근무하는 형을 만나 밥과 커피를 얻어먹고는 소포로 책 몇권과 원두를 보냈다. 형수님께서 커피향이 그렇게 진하고 좋은 건 처음이라며 기꺼워하셨다고. 요즘 세상에 소포로 커피와 책을 나누다니 나 스스로도 신기하지만, 이렇게 콩이 오고 가고, 그러면서 나는 여전히 매일처럼 볶고 내린다. 


"커피들 드시겠어요?"

"아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 커피?"

"아 네 마시겠습니다."


 아침에 한잔 내려드린 우리 교무실 왕고참 선생님께서는 업무에 집중하시며 커피를 거절하셨다. 역시 커피는 딱 하루에 딱 한잔만 드시는구나. 거의 쉴 틈 없이 마셔대는 나는 괜찮은 걸까 싶긴 한데. 다른, 새로 오신 선생님, 다시 말해 스콘의 주인공께서는 재차 물으니 승낙한다. 나는 빵빵한 커피 봉투에 칼집을 먼저 낸 뒤에 가위로 적당히 입구를 만들어 잘라낸다. 강하게 볶아진 커피의 기름 내음과 함께 이산화탄소가 푸쉬쉬 빠져나온다. 어우. 좀 기름 냄새가 세다. 


 기름기 가득한 원두를 르완다 반탐을 조금 섞어 갈아내니 어어? 나가시네?


"어 선생님 수업이세요?"

"네네 아이구."


 헐. 커피를 못 드렸네. 이게 서로가 애매한 지점이겠지. 새로 오셨고, 같은 부서는 아니고 같은 교무실을 쓰고만 계신 선생님의 입장.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올라와서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 끝무렵에 콩을 받아와서 그걸 테이스팅 해보겠다고 뜯어서는 다른 선생님과 나눠먹겠다는 나나. 그나저나 이를 어쩌나. 콩을 넉넉히 갈았는데. 


 일단 나는 비커를 들고, 종이컵을 챙겨서 큰 교무실을 한바퀴 돌았다. 마침 딱 네분의 선생님만이 있어 비커 안에 든 커피만으로 맞춤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3시에 예정된 조퇴를 위해 짐을 싸려니 영 마음에 걸린다. 커피 내려드린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휙 조퇴를 나가버리니, 커피를 갈고 있는 나를 보시고 올라가, 수업 끝나고 오셨는데 내가 안보이고 커피도 없다면 좀 당황하지 않으실까. 


 대강 업무를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하면서 나는 다시 커피를 갈았다. 드립커피긴 하지만 3인분 정도 넉넉하게 내려서 늘 나눠먹는 편인데 이번엔 딱 1인분. 선생님의 자리에 가서 컵부터 들고왔다. 그리고 오늘의...네번째쯤 되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콩은 너무 많다. 집에도 많다. 사방 팔방 친지들에게 콩을 뿌려대는 짓만 하지 않으면 한 10만원 정도면 1년 내내 무제한으로 커피를 마실 수는 있겠다. 그러고보니, 콩 보낼 선생님이 두 분 정도 남아있는데. 


 커피를 내리면서 쪽지를 썼다. 설명은 해야 하니까 조퇴를 하는 사정 정도는 알려야겠지. 제가 3시 조퇴라 미리 내려드리고 갑니다. 조금 식었더라도, 맛있게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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