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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Sep 23. 2020

커피 내리기 딱 좋은 계절

복도까지 커피향이 퍼져서

 여름의 날들이 빗방울에 녹아서 쉬이 사라져버렸다 한들 가을 하늘이 덜 아름다울 리는 없다. 미세먼지에 잔뜩 찌푸리던 하늘이 멈추어버린 공장들 덕분일까 연일 탁 트여 망망한 감각을 일깨워내고 창틀을 넘어오는 바람은 마치 살갗에 명주실이 스치듯 가비엽다. 추분이었던가. 잠자리를 잡아 잠시 손가락으로 네 날개를 붙들고 있어도 이제는 땀으로 그것을 적시지 않으리. 파라락 다시 날개를 펴고 오르는 녀석들처럼 바람이 높고 낮게 흐르고 흐른다. 작은 우리집 거실에서도 커다란 교무실에 조용히 앉아있을 때에도.


 아침에 학교에 도착을 하면 언제나 가방을 내려놓고 포트에 물을 받는다. LED 등의 파란색을 확인하고 작은 기계식 그라인더로 콩을 요란하게 갈면, 신선한 커피가 초콜렛같은 내음을 풍기며 이내 공간을 채운다. 드리퍼에 거름종이를 끼우고,커피를 가는 사이 데워진 물로 한번 씻어낸다. 종이 내음을 빼는 공정. 번거롭지만 빼먹으면 코에 휴지를 끼우고 커피를 마시는 기분을 피치 못하게 겪게 된다. 좋은 커피일수록 맛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하물며, 내가 땀 흘리며 볶아낸 것이라면야.


 날씨가 서늘해짐으로써 커피를 즐기기 좋아진 것은, 커피를 볶는 수고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여름엔 집에서 콩을 볶는 것이 고역이다. 환기를 해야 하니 창문을 앞뒤로 열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폭염을 양쪽으로, 화구를 정면으로 받으며 부지런히 양 팔을 흔들어야 한다. 여름에는 커피콩을 볶느라 한시간에 세번씩 샤워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콩을 볶는 것은, 내가 원할 때 내가 좋아하는 배합과 숙성도, 볶음도로 가장 신선한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무척 저렴한 가격에.


 금요일 퇴근 때면 남아있는 콩을 확인을 하고, 주말 저녁엔 적당한 시간을 택해 산들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냄비에 콩을 붓는다. 인덕션으로 볶아낼 수 있는 콩의 분량은 한계가 있다. 혼자 먹는다면 적당히 볶아 딱 적당히 내려먹을 양이 되지만 교무실에서 여럿과 나누어먹으니 소요되는 양이 퍽 많다. 그래서 작은 냄비에 여러번을 볶아야 한다. 시간은 빼앗기지만, 그 혜택은 크고 그것을 모두가 나누니 즐거운 시간. 이건 어때요? 이건 맛보셨어요? 이런 대화를 나누던 기억을 떠올리며 콩들을 고른다. 맛있게 먹은 커피생두를 남기고 일부러 새로운 원두를 여러개 골랐다. 이번에 산 생두들은 대체로 마음에 든다. 겨울쯤에 새 콩을 살 시기가 되면, 이제까지 먹었던 콩들 중에 가장 맛있는 것으로만 사야겠다. 그런데, 그때 되면 창문을 또 잔뜩 열고 볶아야 할라나. 한두번 해보고 도저히 난방비도 아깝고 추위가 감당이 안된다 싶으면, 사먹으면 된다. 기쁘게 결론을 내리고 치익치익 콩이 익어가는 소리와 빛깔을 즐긴다. 콩은, 내가 게으르면 타버리고 성급하면 설익는다. 좋은 커피가 되느냐 마느냐는 그것을 볶는 이의 깜냥.


"커피 얻어먹으러 왔어요. 냄새에 이끌려서."

"냄새 나요?"

"복도까지 냄새가 다 나."

"저는 비염이라 사실 냄새를 잘 못맡아요."

"아 냄새 너무 좋다. 감사합니다."


 갈아진 콩에 물을 살살 뿌리고 나서 잠시 바라보고 있으려니 보건선생님이 생글생글 웃으며 온다. 코로나 덕분에 매일 분노와 해탈을 오간다. 공문은 아침에도 오고 퇴근시간에도 온다. 마스크를 절대 얼굴에서 떼지 않는 실천의 표본인 그에게 필터를 뚫고 전해지는 신선한 커피의 향이 만성 비염 환자인 나에게는 반의 반푼이나 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피가 좋다. 그래서 내리고, 그래서 갈고, 그래서 볶기 시작을 했지. 그새 두명이 더 주변으로 온다. 모두 내가 볶은 콩을 나누어먹는 사이들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새 콩을 조금 더 갈면서 드립포트로 조심스럽게 커피에 물을 붓는다. 부풀어오른 커피 머핀 한 가운데에서 몽글몽글 거품이 솟아나며 한껏 커피 향이 뿜어져 나온다. 보건 선생님 한잔. 나 한잔. 옆에선 내 커피멘토가 새로 간 커피를 내리기 위해 거름종이를 헹구는 중이다. 청출어람. 그에게 배운 커피를 나는 계속 파고들어가고 있다.


 커피 내리기 참 좋은 계절이다. 에어컨 바람이 없어 더욱 커피가 맛있다. 한번 커피를 볶아낼 때마다 샤워를 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더 잘 볶아지는 느낌도 든다. 그렇게 타닥타닥 볶아내 드륵드륵 갈아서 살살 내리는 커피는 어제와 조금 다르고, 그제와는 더욱 다른 오늘의 마중물이 되어 나를 다시 노트북 앞으로 이끈다. 아침의 가을바람이 스치우는 손길로 마우스를 잡고 딸깍. 갓 내린 따듯한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파일을 하나 또 딸깍. 코로나가 어떻든 그저 무르익어가는 가을처럼, 해맑기만 한 아이들의 웃음이 복도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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