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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pr 25. 2021

한국의 성차별과 그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몇가지 관점

후투와 투치, 프란츠 파농, 오만과 편견, 정치권력

르완다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호텔 르완다>

후투와 투치


 1994년,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선 불과 100일만에 8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가 사라집니다. 르완다의 다수종족인 후투가 소수 투치족을 학살한 것이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학살은 식민지 종조국 벨기에가 제 멋대로의 기준(유럽인과 보다 닮은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더 우월한 종족이다!)으로 윗 마을 아랫마을 같던 두 부족을 갈라놓았던 것에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벨기에는 그리고 소수인 투치족에게 보다 많은 혜택을 줌으로써 두 부족을 분열시키고 지배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러한 식민지 지배전략이 르완다의 독립 이후 몇가지 정치적인 사건과 겹치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낳았던 것이죠.


 후투와 투치의 사례는 제국의 지배전략으로서 두고두고 곱씹어볼만합니다. 피지배계층을 둘로 나눠 한쪽에게 혜택을 몰아줌으로써 기득권과 선민의식, 적개심이 확산되고 민족의 화합을 쉽게 제어하였으니까요. 반면 피지배계층으로서는 철저히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분열과 갈등을 만들어낸 실체가 사라지고, 피지배계층끼리 죽고 죽이는 투쟁을 했으니 말입니다.


 한국을 볼까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지역감정 문제가 있지요. 박정희 군사정권은 영남에 막대한 개발이익을 부여하면서 김대중의 지지세력인 호남을 차별하고 소외시켰습니다. 김대중 스스로도 정치경력 후반 들어서는 호남의 지역 정서에 기대려는 태도를 보였고, 전두환의 광주학살, 김영삼의 삼당야합 이후 호남과 영남은 견원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런 정치적 갈등의 여파가, 부산 출신 민주당 대통령이 두번이나 집권을 한 현재에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후투와 투치라고 부를만하지요.


 다른 예로 지난 두번의 권위주의 정부는, 노동유연성 강화의 명분으로 정규직 기득권 약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쉬운 해고가 청년의 일자리를 만들어준다는 말도 덧붙였죠. 마치 우리의 일자리가 정규직, 아버지 세대 때문인 것처럼 호도하는 전략으로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려 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적당히 집단을 설정하고 한쪽에 조금의 특권을 나눠줍니다. 사드로 문제가 되었던 성주에서도, 밀양에서도, 강정에서도, 먼저 보상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면 단결된 목소리가 나올 수 없고, 권력집단은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성적 동등성의 문제는? 네 맞습니다. 물론 당연히 조선의 가부장제의 수혜를 받은, 생물학적으로 더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후 한국사회의 권력층을 내내 점유하고 있는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압도적인 억압자로 여성보다 윗자리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더 쉬운 직업 선택의 기회와 더 강한 사회적 지위보장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남성이 그렇진 못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구조는 어떤 모양일까요. 여성과 남성, 두 계층이 대척점에 서서 한쪽이 억압자, 다른 한쪽이 피억압자로 존재하고 있나요? 저는 다른 구조라고 봅니다. 소수의 주류 남성 엘리트 계층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그 아래에 남성과 여성, 모두가 피억압자로 존재하고 있는 그림으로 말입니다.


 지금의 사회를 보지요. 사회적 자본은 기득권이 온통 독식하고 있고 남녀를 불문, 민중들이 향유하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인해 자살은 세계 1위죠. 7포세대인지 8포세대인지, N포가 몇개인지 세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덕분에 다수의 남성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도 여성집단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는 물론 그대로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여성보다 많은 점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긴 합니다만, 기름에 튀겨지나 물에 삶아지나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 다수의 남성도 피해의식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경쟁은 고도화되고 삶의 조건은 각박해지는데, 직업선택의 기회도 성선택의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한 처지는 마찬가지인 것이죠.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업 면접에서 최종 후보로 남성 3명과 여성 3명이 남았는데, 기업에서는 남성 3명을 뽑고 여성을 모두 탈락시켰습니다. (실제로 비일비재한 일이죠.) 잘못은 누구에게 있나요? 남성 후보자들입니까 기업입니까? 혹은, 그 남성들 중 하나라도 여성들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들에게도 자신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여성들의 원망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주류 엘리트 집단에게 콩고물을 받아먹고 있는 남성들일까요, 아니면 이러한 권력구조일까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의 집단의식이 고양되고 있는 것은 대단히 긍정적인 일입니다. 개인의 인내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단 구조적으로 문제를 인식하려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지요. 여성들만의 연대가 큰 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전과 큰 차이를 보입니다. 다만 그 집결된 목소리가, 5년이 지난 지금까도 권력이 "후투와 투치 전략"으로 통제하기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만 표출되고 있다는 점은 심각히 우려가 되는 점입니다. 잘못된 인식은 잘못된 해결책을 부르기 때문이지요. 여성 다수가 겪고 있는 차별과 억압의 가해자가 남성 다중일지. 이들 남성 다중을 향한 투쟁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인 것인지.


 스스로 남성의 전략도 조금도 영리한 구석이라곤 없습니다. 여성들의 집결된 목소리로 인해, 권력구조에서 발생된 피해의식이 자극되자 남성집단에 편중된 사회구소 속에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여성들을 조롱하고, 성적 대상화를 하고, 물리적 폭력을 여전히 행사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 남성 다중의 뒤에 자리하고 있는 지배권력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는...우리는 후투와 투치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 점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파농.


프랑스 소년을 죽인 알제리 아이들 - 폭력의 고리


"왜 그 아이를 죽인 거니?"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인을 죽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는 친한 친구가 아니었니? 왜 그런 거니."

"우리를 믿고 따라올 프랑스인이 걔밖에 없었으니까요."


 프랑스의 식민지 알제리 출신의 정신분석의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인 초등학생 3명이 프랑스인 급우를 죽인 사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무런 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린 소년에 대한 살인행위가 그가 속한 집단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된 현실. 파농 자신이 흑인 알제리인 상류층으로서 프랑스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년들이 이런 행각을 이해할 수 없었죠.


 그러나 식민지 알제리 민중에 대한 가혹한 폭력과 수탈을 먹곡하면서 파농은 알제리독립을 지탱하는 막강한 투사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검은 얼굴 하얀 가면>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선언서와 같은 저작들에서 파농은 이렇게 밝힙니다. "피지배계층이 보이는 폭력성은 그들에게 누적되어 온 폭력의 반작용이다." 즉, 아프리카의 피억압자로 공동체가 파괴되고 폭력이 노정되는 경험을 하는 동안 피해민중은 자신에게 축적된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인에게 폭력을 전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폭력을 두둔하는 듯한 그의 주장은 피지배계층의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에 대해 훌륭한 해석을 제공합니다. 단지 범죄로 단죄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제안도 함께 말입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남성과 여성, 상호에 대한 혐오발언과 범죄행위에 대해서도 파농의 관측이 상당히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강고한 남성기득권 우월적 구조는 여성 다중에게 크나큰 생래적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고추와 비교되면서 부여된 성적 정체성에, 삶의 매 시시각각 여성에 대한 성규정으로 자아를 억압당하지요. 이정도의 사회에서 집단적 병리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합니다. 성장과정에서 적절하게 사회적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기회를 몇번쯤 가지는 여성도 많습니다만 그것도 한두번의 연애와 수십번의 직업 경험(취업과 근무를 포함한)을 거치면 상당수는 그 정체성이 쉽사리 무너져내립니다. 남은 것은 체념과 복종, 저항과 억압, 수용과 지배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보기엔 엉뚱하게도 남성들은 자신이 강자이며 자신들을 수탈하는 집단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합니다. 이토록 자신들의 고통은 큰데 말이죠. 그래서 파농이 지적했던 것처럼, 누적된 폭력을 상대방 집단의 약자를 찾아 행사함으로써 해소합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다들 보셨을 것입니다만 거기에 나오는 지영 언니 은영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동생에게 손찌검을 하는 장면이 수시로 나오거든요. 남동생이 누나에게 어떤 억압을 가했을까요? 이유를 애써 찾아본다면 가해자 집단의 대표로서 남동생이 피해자 집단의 대표인 누나에게 평생에 걸쳐 이유없이 폭력을 당해온 것이거든요. 조금 우스운 일이죠.


 이처럼,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또 그 반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이상현상”에 대한 판단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증오는 확산되고, 혐오는 반복됩니다. 다른 사례로 최근 양성평등원에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합의되지 않은 개념을 교육자료에 넣었다가 홍역을 치른 바가 있는데요, 잠재적 가해자 개념은 그것이 실재하는 현상이면서도 그것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려는 노력 없이 상당히 남용되면서 오염되어 사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사회적 물리적으로 약자이면서, 특히 언제 어떻게 성범죄에 노출될지 모르기 때문에 남성은 느낄 필요도 이유도 없는 공포와 경계를 평생 품고 삽니다. 성범죄의 양태는 또 워낙 다양하여, 밤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어도 성범죄를 당할 수 있고,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성범죄를 당할 수 있고, 택시를 타도 당할 수 있고, 집에 다 와가는데 당할 수 있습니다. 샤워를 하다가 당할 수도 있고, 자다가도 당할 수 있죠.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평생 끌어안고 사는 이 공포감은 그러나, 성범죄 가해자인 남성이 없으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므로 그 가해자인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명명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범죄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와, 그럴 의사가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더욱이 단지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여 타자화된 집단을 잠재적 가해자라는 적대적인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은, 적어도 최소환 그에 걸맞는 논증의 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죠.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은 가능성의 차원으로는 규정되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모든 종교가 구원을 약속한다 한들, 그에 걸맞는 종교적 실천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종교적 실천이 없이는 구원은 커녕 종교인도 아니지요. 페미니즘이 뿌리를 두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정적 사실의 존재를 부정하고, 주체의 다양한 실천행위에 따라 다만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관측되기 전에는 정의할 수 없다.”라는 것이 현대과학과 철학의 중요 토대지요. 모든 운전자들은 음주운전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단지 운전을 하는 것만으로 음주운전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지는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여성의 입장에서 성범죄에 대한 항시적 경계와 공포는 실재하는 현상이지만 그 가해자인 남성집단에게 잠재적 가해자라는 본연적 정체성을 각성하라고 하기엔 실천이라는 행위 근거가 부재하다는 사실이고, 그런 논증과 토론이 없이는 상대방에게 강제될 수 있는 개념은 아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 사회의 성차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첫번째 문제점이 도출됩니다. 명백히 존재하는 현상조차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의사소통 구조를 여성과 남성이 각자 집단 내에 갖고 있습니다.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이므로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하라."라는 요구는 대체로 성범죄와 물리적, 명시적 폭력에 한정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나 객관적으로 참에 가까운 주장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만성적 성범죄에 노출된다는 공포감과, 불공정한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에 공감해달라."라는 요구가 보다 합리적일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문제는 이런 현상을 파악하고 성찰할 사회적 프로세스가 상당히 망가져있다는 점입니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가장 큰 문제죠. 사회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적절히 미디에이팅해야 하는데 혐오를 반복 확산하는 쪽이 언론도 지식인 쪽도 훨씬 돈이 잘 벌립니다. 이런 폭력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해석되고 수용될지 우리는 명민한 감각으로 토론하고 성찰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폭력은 어디까지나 폭력일 뿐이고, 총알은 항상 과녁에 올바르게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제리 소년들이 프랑스 소년을 죽인 것은 알제리 민중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를 부각하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일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지. 반복될 때마다 알제리인들이 아무런 입장의 변화 없이 이 사건을 대한다면 또 어떤 결과를 부를지. 언제까지 저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일 수 있을지. 깊은 성찰에 기꺼이 몸을 담는 집단이 너무나 소수로 보입니다. 그리고 만일 프랑스 소년의 형제가 저 아이들을 살해한다면, 그러한 폭력을 우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논점은, "너희가 행한 폭력을 보라"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여전한 세번째 문제. 적대적 공생관계입니다.



오만과 편견


 이러한 성찰이 부족할 때 가게 되는 종착역이 있습니다.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개념인데 극단주의 성향의 남성집단 일베의 언어관습부터 흔한 남성들의 일상적인 언어폭력, 미시적 폭력까지. 여성들이 겪는 폭력이 과거의 메갈리아부터 현재의 여성주의 집단 내에서 그대로 재생산되고 있지요. 여성 집단의 혐오발언들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남성들의 일상적인 언어폭력이 논거가 되어 돌아옵니다. 양 극단의 중간지점에 있는, 보다 온건한 사람들이 어떤 문제제기를 하든 말이죠.


 이처럼 주류 기득권에 기대고 있는 남성들은 오만하고, 피해계층인 여성은 이 프레임에 갇힌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 쉽게 해답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2003년(너무 오래됐습니다만)에 출간된 <오만과 편견(임지현, 사카이 나오키)>은 이것을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라는 큰 틀에서부터 세계사를 통시하며 집단주의에 대한 해체를 답으로 풀어냅니다. 집단에 갇힌 인식이 인간성이 발휘될 공간을 제한하고 개별주체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되면서 폭력은 재생산되고 지배구조의 공고화됩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스펙트럼을 넓게 바라보고 개별 주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대화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가령 친일파 문제를 예로 들자면, 적극적인 소수의 친일파만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동네 이장부터 면 서기까지, 침묵하는 부역자라는 광대한 회색지대가 있지요. 실제로 일제에 협력한 이런 사람들은 그러나 적극적으로 이득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역사적 판단을 어찌해야 할까요. 21세기 오늘날, 적극적으로 여성착취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침묵하는 다수의 남성들에게도 똑같이 가해져야 할까요?


http://www.yes24.com/Product/Goods/362017(이 책이 절판이 아직 안됐다고...?)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일부 기득권 남성집단이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사회구조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죽창을 들기 전까지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정확한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짚어보아야 할 부분은 될 수 있겠지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대방을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으류 규정하기보다는 당사자의 주장과 집단의 주장을 엄격히 구분하고, 면밀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각자의 모집단에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 아닐까요.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적대적 공생관계는 나날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생활공간이 /오프라인에서 완전히 분리된 일반 성인들은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있습니다만, 여성과 남성 각각의 영토에서는 서로를 표적으로  혐오담론이 집단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유튜브나 댓글, 채팅 등을 통해 왕성히 유포되고 있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논거가 됩니다.  한남들을 보라,  메갈들을 보라 하며. 그러한 혐오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이번 서울시장 선거의 결과에 충격을 받습니다. 10~20 남성들을 중심으로 민주당이 페미니스트 집단이기 때문에 표를   없다는 주장이 몇년째 뚜렷한 근거가 없이 확산되며,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성갈등이 세대 내에서의 분열을 일으키고, 20 남성의 민주당 지지율이 20% 안되는 결과를 받아들지요.


 물론  갈등이 20 남성 집단의 이반의 전체의 원인은 아닐 것입니다만, "민주당이 페미정당이라 못찍겠다."라는 주장이 반복확산되는 것은 사실이며, 그러한 근거없는 혐오담론이 정치권력과 결부되어 형성되고, 주권행사의 공정성을 위협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요. 당장, 집권여당으로서 성차별 의제에 대해서 정책의제를 내놓았을 뿐인 민주당이 페미니즘 집단이라고 지칭되는 것도 사실이 아닐 뿐더러, 다양한 이유를 갖고 지지정당을 선택한 여성의 입장에선 그런 담론 자체가 이해할  없는 현상일 것입니다. 해결된 것도 하나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여당을 지지하는 것은 민주당이 페미니즘정당이고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다른 정책의제 때문인데 말입니다. 허나,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결국은 그러한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런 적대적 공생관계와 정치권력과의 결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신중한 고민은 필요할 테죠.


성과 권력, 정치


 나이브한 관점으로 보이긴 하겠으나 "너도 잘못 쟤도 잘못"이라는 잔소리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정치전략의 관점에서 글이 읽히길 바랍니다. 각자가 자기 앞에 놓인 불이익들에서 헤어나오기 너무나 어려운 구조 속에서 결국엔 알제리의 비극과 르완다의 참극은 발생한 것이니까요. 학살을 멈추라고 후투 족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같은 피해집단이며 복수의 주체, 그들 중의 일원인 후투 자신 밖에는 없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거기에 벨기에 군대가 와서 총을 갈긴다는 훨씬 더 신속한 해결책도 존재는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성차별로 발생한 자기 집단의 피해를 복구하고 보복하기보다는 그것을 빚어내는 사회구조를 어떻게 교정할지에 대해서, 조금쯤은 신중하고 진지한 논의가 지금이라도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엉망진창인 집단 내 커뮤니케이션 구조, 시궁창인 사회적 의사소통 프로세스, 그 속에서 확산되는 적대적 공생관계에 맞서서 누군가는, 권력구조 자체에 칼부리를 돌려야죠. 그렇게 되면 생각보다도 여러가지 대책은 또 어찌저찌 마련됩니다. 당장 부동산 문제만 해도 부유층 다주택자와 임대사업자들의 소유세를 파격적으로 올린다거나. 시총 규모에 따라 대규모 사업장의 노동시간을 주당 32시간 정도로 줄여서 채용을 확 늘린다거나. 아니면 그냥 기본소득을 당장 다음 선거 때 법제화한다거나. 여러가지요.


 물론 정치권력도 바보는 아니라서 잠시만이라도 그런 "협력"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베를 만들었듯이 여성 내에서도 폭력적인 집단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착취구조를 강화하려는 여러방안을 짜낼 수도 있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헬조선 탈출" 같은 방법도 현실적으로 영리한 선택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 오늘날에, 이대로 손 놓고 있어서야 될까요. 서로를 바라보며 아까운 줄도 모르고 침이나 매일 뱉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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