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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r 05. 2021

두 약자의 죽음

그들이 만들던 상상세계, 그러나 다른 결말

 포스트모던은 파괴가 아닌 답을 찾아내기 위한 절박한 탐구의 여정이었다. 절대적인 선으로 인식되었던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 세계를 무참히 파괴하는 참화를 목격하고 난 뒤, 완전히 새로운 토대에서 인간의 미래를 모색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도 도덕적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대전의 와중에 독립을 위해 피를 흘렸던 제3세계의 민중들은 유럽과 미주에 끊임없는 도덕적 재성찰을 요구했다. 보편성의 경계는 끝없이 무너지며 결승점을 저 멀리 바깥으로 밀어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수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세계를 위해 긴 탐구에 나섰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비판되고 공박당한 기존의 사회관, 인간관을 극복하여, 현대의 다양한 철학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하나 둘 내어놓았다. 그 중에 찰스 테일러가 있었다. 그는 개인화, 그에 따라 파편화된 인간관을 부정하고 사회공동체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가장 자유주의적 사상을 잘 보여주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조차, 개별 경제주체들의 행위는 경제적 이익 하나만을 통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도리어 "유럽"이라는 지형, "현재"라는 공간, 그리고 그가 속한 다양한 정치사회적 공동체의 관념에 따라 결정된다. 이를 테면 돈 많은 유대인에게 고기를 팔지 못하겠다는 푸줏간 주인의 모습을 우리는 흔하게 생각할 수 있다. 사회와 문화의 거대한 우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없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


 그런 테일러는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공동체 다중의 "상상"의 연대에서 찾았다. 절대적 선과 정의의 기준이 사라진 포스트모던-현대 사회에서 무엇이 옳은 것이며 어떤 것을 우리가 택할 것인가는 공동체 속에서, 그들이 처한 현실의 대안으로서의 상상세계에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테일러는 생각했다. 테일러의 "상상" 개념은 현실 민주정의 정당과 정책결정에 부합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어떤 사회적 의제를 발견하고 그로부터 해결방안과 대안을 모색하며, 그를 지지하는 공동체와 함께 입법운동을 하고 정책의제에 동의를 얻어나가는 것. 즉, 우리의 상상으로부터 현실적 정합성을 찾아가나는 과정이 현실 민주정과 거의 유사한 것은 아닐까?


 두 약자가 죽었다. 마 째 신과 변희수 하사. 한 사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국을 위해. 다른 한사람은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체성을 존중받고 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저마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싸움에 부끄러움 없이 뛰어들었다. 둘이 마주했던 현실은 규모의 차이일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크든 작든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나서 싸울 수 있다. 우리의 개별 상상이 더 많은 공동체의 그것과 조응할 수록 우리는 하나의 인간으로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마 째 신은 미얀마 군부의 총구 앞에서, 변희수 하사는 성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데에서 자신의 인간성의 본질을 발견하였고, 그를 위해 투쟁한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원하는 모습과 원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그것을 실현코자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던 두 사람의 결말은 같지 않다. 그것이 이 둘을 하나의 글에 담는 이유다. 마 째 신은 그녀가 꿈꾸는 세상을 함께 이루어나갈 무수히 많은 민중들 사이에서 함께 싸웠고 숨졌다. 그래서 그녀는 그 세계의 일원을 넘어서 상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변희수 하사가 살던 상상의 공동체는 너무나 보잘 것 없이 작았다. 그녀는 홀로 죽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작디 작던 세계는 법과 제도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망각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들의 상상을 맞이하고 품어줄만큼의 성찰을 이루어내지 못한 때문에. 한 사람은 공동체와 시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한 민주주의에 의해 억압되고 소멸되는 것은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모든 이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상세계와 그 공동체가 충분히 크지 않은 생명의 죽음은 더욱 쇠잔한 것이 될 수 밖에 없기에, 그리고 남은 공동체의 인원은 더욱 줄어들 수 밖에 없기에 더욱 비극이다. 동시에, 변희수 씨의 죽음에서 발견디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사유로도 무너트리지 못한 개인의 선택의 신화, 생래적 기득권이라는 신화가 더욱 공고하게 인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현장이다. 현직 군인이 복무 중에 성전환 수술을 한다는 선택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개별화되고 타자화되었다. 그녀의 용기있고 외로웠을 선택을 알아준 이는 너무도 없었다. 남성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되고자했던 여성들조차 그러했다. 그녀가 아무리 여성의 정체성을 말해도,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생래적 정체성을 그녀는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연시도 긴 고통의 터널로 몰아넣었던 근대의 파멸적 욕망으로부터, 과연 조금이나마 성찰을 하긴 했던 것일까?


  우리는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상상을 일구며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의 저마다의 애처로운 상상의 나래는 어째서 공동체와 만나, 큰 길을 함께 만들지 못했던 것일까.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상상을 하며 그것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는 과연 인간이긴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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