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의 결절과 인간화 교육의 가능성

한국 교육의 비극은 생산구조와 따로 논다는 점!

by 공존

유럽에서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착종되었다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편되어 우리 곁에 남은 초중등 의무교육의 역사를 살필 때 수없이 많은 교육주체 및 이익관계자들의 논쟁과 담론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루터가 종교혁명과 함께 학교를 세워 문자교육을 시작했던 것처럼 카톨릭의 압제로부터 영혼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보여주듯 아동노동자들, 비참한 최저계층의 삶을 방치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고, 미국과 소련의 우주전쟁처럼 교육과 기술 수준이 다른 열강에게 뒤쳐져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저마다 무수한 곡절을 겪었다. 일본의 경우, 후발산업국가로서 열강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하여 의무교육령과 중학교령을 포고하여 근대교육을 확립코자 하였으나 수업료와 전통문화 등의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무상교육을 시행하여 의무교육의 실현이 비로소 진전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중등교육의 양적 확대에는 성공하였으나 계층분화와 함께, 유력 중학교의 입시경쟁율이 폭증하는 반면, 교육의 질과 교육목표의 실현이 담보되지 못하여 졸업율이 입학자의 5할을 밑돌았다. 영국의 경우 “모든 이에게 중등교육을”이라는 목표 하에 1918년 피셔법으로부터 1941년 노우드 교육원장관의 주도 하에 대학준비교-보통학교-실업학교의 세가지 학교체계를 확립한 삼분위 제도가 탄생하기까지 길고 장대한 논의를 걸쳐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교육제도가 형성되었지만, 영국의 강고한 계급구조를 뚫고 교육의 보편화를 이뤄내지는 못해 삼분위제도는 그대로 각 클래스가 재생산되는 형태로 남아있다.


특히 미국의 중등교육의 확대 과정은 현대 미국의 교육 상황과 비추어 하나의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수차례의 경제공황 속에서 주 별로 다양한 교육체제를 정비해 하나로 통합하며, 그와 함께 교육에서의 인종과 성별의 차별을 없애는 데에는 말 그대로 소송전을 불사한 상당한 사회적 동력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중등교육을 무상 의무화의 원칙 하에 전 국토에 확산하고 정착시켰다.


오늘날 미국의 공교육이 얼마나 주 재원에 취약하고 교육의 질과 교사의 처우가 낮은지를 감안한다면, 미국의 중등교육 제도화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어째서 이런 사회적 논의와 자본이 투자된 국가 영역을 방치하고 쇠락하도록 두는가? 2021년 오늘날 미국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권리"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1920년대의 그것, 1890년대의 그것에 비해 낮은 것일까? 어째서 19세기의 미국이 반응했던 국민들의 교육에의 열망을 21세기의 미국은 배반하고 있는 것일까?


주지의 사실로서 중등교육 형성과정을 볼 때 선발 산업국가들은 모두 예외 없이 사회 변화와 산업구조 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의무교육 제도화는 중세 농경사회가 해체된 영향을 받았고, 기술산업이 발전하면서 각국은 교육제도를 정비하고 교육의 수혜자를 확대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진작하고자 했다. 중등교육이 확대되어가던 민주주의와 인권의 시기는 제국주의가 점유한 지구상의 식민지가 포화상태에 달하여, 대량생산된 잉여재화가 인플레이션과 공황을 일으키고 마침내 세계대전을 촉발한 광기의 시기이기도 했다.


국민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요구이기도 한 공교육 제도가 이와 같은 “국가정체성”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의 중-고등 교육 확대 과정은 국민의 여론 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의 요구에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영국에선 공장주와 사업가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중등 의무교육의 도입이 7년간이나 유예되었고, 미국에서는 격화되는 노동-자본 대립, 완화와 타협의 정책 등이 중등교육의 확산에 고려되었다. 이후에 이루어진 일반학교와 직업학교의 분리 역시 그러한 산업노동력을 둘러싼 요구와 수용의 결과물이다.


마땅히, 산업자본의 요구에 따른 교육 제도의 변화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최적 투자하여 효율적인 국가경영을 도모해야 하며, 공장과 농장에서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아동 노동력을 학교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고려해 정책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근대 중등의무교육이 정착이 바로 현현한 이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산업자본의 노동력이 중등의무교육 확산의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면, 교육개혁 시기의 산업구조와 교육투자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종전 후 짧았던 대통합의 시대를 건너 영국과 미국에선 신자유주의 개혁이 교육에 밀어닥쳐, 60년대부터 이미 산업노동자 수요의 폭증에 대응하기 위해 증가한 교육투자가 회수되고 도리어 공교육에 대한 투자가 대폭 감소한다. 19~20세기의 중등교육, 특히 기술교육과 실용교과의 확대가 산업사회의 요구였다면, 20세기 후반 드러난 교육재정 감소는 영미에서의 산업 노동자 수요가 폭감한 것과 연계해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을 비롯한 선발산업국가가 걸어온 이 장대한 과정을 한국은 갖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50여년에 걸쳐 진행된 중등단계의 의무교육은 식민조선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일본에서 중등의무교육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에서 겪은 불공정과 불평등 상황이 식민조선에서 차별적인 형태로 반복된 상황은 민족적 트라우마로 남아 해방후 폭발하는 교육열을 불렀다. 한편 일제 식민지 시절 형성된 공업 인프라는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교육 근대화의 큰 결절로 남았고, 전후 최빈국 상황에서 노동력의 수요 없는 교육정책의 고도화와 양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한국 교육이 결여하고 있는 근본 문제는 이로 인하여 교육체제가 역사적으로 고립된 섬과 같은 위치로 사회로부터 유리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1950년대에 이미 대학 졸업자조차 노동 수요가 없는데 생산되고 있었다. 교육 차별에 대한 민족적 저항심이 교육수요를 부르면서 국가 산업구조와 불일치한 중-고등 졸업자는 계속 양산되었고, 산업구조와 무관한 고학력 집단이라는 상황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처럼 산업자본의 요구와 불일치하여 교육 수혜자가 과잉 생산된 나라가 없다. 한국 사회는 국가 산업 및 노동구조와는 무관한 양적 성장과정, 민족주의와 지위상승의 열망이 결합에 의해 수행했다.


한국 교육이 결여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에 의하여 교육의 도구화가 가속되었다. 엘리트 교육의 전제는 직업교육의 내실화다. 직업교육이 노동산업구조와 탄탄하게 연결되어서 빠르게 다수의 중등학력자가 사회에 진출하고, 소수의 고학력자가 고등교육까지 엘리트 교육을 밟는 것이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치와 생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육은 노동계급도, 그를 위한 교육도 존재하지 않고 산업구조와 불일치한 양적 성장이 이루어졌으니 교육의 다양화도, 엘리트교육과 실업교육의 내실화도 불가능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자원의 최적 투자나 산업노동 수요와 관련이 없이 교육의 확장이 이루어졌으니, 대학정원 증가, 평준화와 표준화평가 등, 학습자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요 교육정책들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입안되어 왔다. 결절이 만들어낸 공백으로 인하여 교육이 국가성원들로부터 유리되어 움직여왔고, 그로 인하여 인간을 위한 교육의 길은 모색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인간화 교육이란 가능할까? 직업교육이 형성하는 자본주의 헤게모니와 교양교육이 형성하는 계층 헤게모니 사이에서 우리 교육이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한국사회는 자본과 계급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발전과정을 겪었고 그런 역사가 현재의 문화창달에 이바지한 점도 사실이다. 토대의 하부구조가 없는 문제는 해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산업자본의 영향력이 막강한 현실에 자본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조치가 섣불리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대신에 인간화 교육의 실현 가능성을 탐지하기 한 다른 질문들이 던져져야 할 것이다. 교육이 국가 성원들의 삶에 밀착하여, 공론의 대상이 되는 질문들.


그러므로, 한국 교육의 역사적 결절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이를테면, 교육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움직임과 동기화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민족사관학교로부터 산청간디학교, 미용고등학교로부터 하나고와 같은 명문고까지 교육을 시민의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와 같은, 삶으로부터 유리된 교육의 문제를 다시 삶의 공간 안으로 끌어올 수 있는, 그러한 질문들이 지금 새롭게 던져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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