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

‘학급당 학생수 20명(유아 14명) 상한 법제화’ 지지를 촉구하는 글

by 공존

*전교조 제안으로 작성된 글임을 먼저 알립니다.

도장 찍는 로봇 [출처=히타치시스템즈]

지난해, 코로나 판데믹에 대처하는 세계 각국의 정책에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러 사람을 웃게도,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한 뉴스가 있다. 일본의 도장찍는 로봇 개발 소식이다. 가뜩이나 인터넷과 정보처리 인프라가 구축이 되어 있지 않아 국민 대부분이 PC보다 스마트폰이 익숙하고, 그로 인해 코로나 대응에도 여러가지 미숙한 점을 노출하고 있던 일본에서 상급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찍기 문화가 온존되어 있다는 것이 한번 놀랍고, 그것이 코로나 판데믹 상황을 맞아 국민들이 병상이 모자라 입원은 커녕 진단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도장 같은 과거의 관습이 혁신되지 못하고 도장찍는 로봇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발현되는 것이 두번 놀라운 일이었다.


왜 일본은 이런 문화가 남아있을까? 어째서 대한민국에선 2000년대 초반부터 전산결재가 도입되어, 이제는 대부분의 사무실에서 완전히 사라진 도장찍기 같은 구시대의 잔재가 살아있던 것일까?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은 이를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명쾌히 설명한다.


오래전 영국에서 마차는 왼쪽 통행을 했다. 오른쪽으로 다니면, 대부분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이 자칫 지나가는 행인을 때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나중에 만들어진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다니게 됐다. 이 ‘자연스러움’의 결과로 영국과 영연방 일부 그리고 따라서 채택한 일본 등은 두고 두고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른손으로 수동식 기어를 조작하기에 편하게 핸들을 왼쪽에다 뒀기 때문이다. (중략) 일본 국회에는 도장문화를 존중하는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이 있다. 얼마전까지 다케모토 나오카즈(竹本直一)라는 의원이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 이 양반이 몇달 전에 과학기술·IT 담당장관이 됐다. 그는 자기 입으로 컴맹이라고 자복한 사람이다. 취임하면서 역사적인 명언을 남겼다. “행정절차의 디지털화와 함께, 서류에 날인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장 문화의 양립을 목표로 한다.” 이 명언이 얼마나 비난을 많이 받았던지, 그는 결국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 회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아이뉴스23 박태웅 칼럼, 2021.03.19.)


경로의존성, 한 집단 및 체제가 과거에 만들어둔 어떤 시스템을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바꾸기 위한 비용 투자를 하지 않으려는 의사결정의 양상과 그 비효율상. 그러나 그것이 단지 비용의 문제일까? 사람의 목숨이 시시때때로 위태로움을 더하는 코로나 판데믹과 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보여준 과거지향적인 행정체제는 경제를 넘어서 한 국가의 문명과 문화수준에 대한 총체적인 의심으로 전이된다. 정부와 기업으로 하여금 전자결재 등의 신속한 행정체계 수립을 망설이도록 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어째서 정부의 공무원들과 기업의 노동자들은 이런 경로의존성의 비효율을 방치하는가?


1970년대 교실 모습. 출처 : 서울교육박물관

무엇이든 빨리 빨리, 글로벌 혁신 아이콘이 된 대한민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로의존성의 사례는 교실이다. 한국의 교육은 1950년대 전란의 참화 속에서 겨우 겨우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과서를 개발 보급하여 교육의 양적 요건을 간신히 맞추어 발전을 시작한 이래, 교육의 질적 요건에 대한 고려와 학생 중심, 아동 중심이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실현한 사례가 드물다. 그간의 학교 교육의 발전상이란 산업구조에 맞추어 외국어 교육과정을 강화하거나 교과를 현대화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에 걸친 입시경쟁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진짜로 교육이 어떤 가치를 도모해야 할지, 그 가치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하며 어떤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긴 시간 동안 강제된 콩나물교실은 부족한 교사(敎舍)와 교사(敎師)로 전국민의 의무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경제가 고도성장하였음에도, 그 경제의 고도성장이 부족한 교육투자에도 불구하고 실현되고 있다는 이유로 교육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국 교육은 그 사이에도 교실당 5,60명이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살인적인 학력경쟁을 아동들에게 부추기고 있었다. 경제성장이 정체기에 들어서고, 미국에서 교육의 질적 발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지 한참이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들어서야 처음으로 교실당 인원을 37명 수준으로 줄이는 정책이 발효되었고, IMF를 막 지나 국가재정이 튼실하지 못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교사동 신축이라는 대형 교육투자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런 정책의 발전도 오래가지 못해 다시 학급당 인원이 40명을 초과하는 일이 다시 발생했을 뿐더러, 37명이라는 인원제한도 어떤 교육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인지, 단지 과밀학급을 조금 완화하는 조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인지 더욱 알기 어렵다.


콩나물교실이 해방 이래 반세기 이상 이어져 온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 교육이 입시 중심의 암기교육, 일제고사 중심의 평가라는 경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의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집약적 산업구조가 자리한다. 한국은 청계천 피복공장이며 거제도의 자동차공장이며 할 것 없이 고도의 노동집약적 산업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후발산업국가로서 질 좋은 교육을 받아 고등지식을 창출할 인재는 필요하지 않았고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를 나와 공장의 충실한 노동자가 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교육투자였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에서는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며 교실은 늘리고 교실 당 아동은 줄이는 조치를 실행할 여건이 마련되었지만, 국가의 교육투자 없이도 학부모가 기꺼이 교육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교육의 질적 향상이나 교육 복지의 확충을 방기한다.(자세한 내용은 Michael Seth 저, 유성상 역 <한국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 참고)


거꾸로 말하면 한국 교육은 오직 기꺼이 착취를 받아들일 충성스러운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한 산업의 요구와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결정에 의해 짓밟혀 온 비극의 역사다. 경쟁은 강요하고 보상은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체제 속에서 국민은 각자도생해야 했고, 그러한 각자도생의 이데올로기는 전국민의 조급증을 불러, 빨리빨리 문화를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뽑아내게 만들었다. 혁신의 아이콘? 그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아동과 교사, 그리고 미래세대인 청년들의 고통이 있었다.

청계천 피복공장. 출처 : 한국일보

베이비붐은 오래전에 끝났고 인구는 줄었다. 이제 학급당 아동 수는 25명에 불과하다. 60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던 교실에서 25명만을 가르치는 것도 교사에게 호사인 판에 이보다 더 줄여달라니 그것이 무슨 욕심인지 모르겠다며 교사의 이기심을 지적하는 목소리, 더욱 더 줄어들 아동과 미래의 교사 적체 문제를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60명의 교실이 25명으로 줄어든 것은 치열한 고민과 노력의 결과인가, 아니면 단지 길고 긴 어떤 레일을 타고 도달한 종착역일 뿐인가? 60명 교실과 25명의 교실 사이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등학교 교사인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교실에선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에 코를 박은 채 6월 학력평가 모의고사를 보고 있다. 바로 박정희정권 시기 "교육부담을 줄여주겠다"며 도입한 전국단위 일제고사,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병폐의 연장 말이다. 2021년인 오늘날에도 수능을 지지한다는, 의심스러운 의도를 품은,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 암기위주의 주입형 교육은 현재진행형이다. 2015 개정교육과정 속 역량중심 교육, 4차 산업혁명이 우리 학교 교육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라지만 일제고사가 그려낸 밑바탕 위에 칠해지는 것은 무채색의 교육에 불과하다. 교사가 애를 써서 수업을 재구성해도 일제고사 형태의 지필평가와 동일한 평가기준을 학생과 학부모는 요구하고, 창의적인 교사별 교육과정과 평가에 의해서 학생들 안에 싹트려던 역량의 단초는 평가 앞에선 이내 생동감 없는 암기지식으로 변모한다. 교사들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교육을 바꾸어내려 해도 한국 교육이 지금까지 따라온 이 경로 위에선 주체가 아닌 객체로, 엔진이 아닌 바퀴로 내려앉을 뿐이다.


25명은 2021년 현재 조금도 원만한 교육조건이 아니다. 50분 수업을 기준으로 한다면 수업과 학습활동을 딱 절반으로 구성해도 25분 대 25분이다. 25분이라, 한명에게 1분씩만 관심을 주라는 말인 것일까? 교실 안에는 수포자도 있고 영포자도 있다. 한명에게 1분만 써야 하는 상황에선 "포자"들을 포기하든 우등생을 포기하든 양자 택일이 강제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체험으론 코로나 이전 교실 대면수업 환경에서의 수업재구성으론 저학력군을 케어하는 것을 적어도 선택할 여건이라도 있었지만 온-오프라인 블렌디드 교육 환경에선 양자의 균형을 그나마 잡아가고 있는 고학력군에게만 겨우 겨우 학습조력이 가능하다. 2년 간 줌과 구글활동지 사이를 오가며 발버둥치는 사이에도 학력격차는 증가했다. 요구되는 교사의 교육활동이 우리 눈 앞에서 시시각각 증가했다. 안이하게 지식중심 교육과정에서 고작 약간의 수업재구성을 해본 경험으로 "서른명 정도면 할만해."하던 때가 다른 훌륭하신 교사들처럼 나에게도 있었지만 코로나 환경에선 "스무명도 많아."라는 말이 저절도 나온다. 코로나의 확산과 함께 확산된 산업의 발전, 교육활동의 변화가 아동의 자발성에 더욱 크게 기대고 있는 탓에 교사는 아동에게 더욱 더 많은 활동을 요구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욱 충분한 교육조력의 여건 마련이 절실하다.


다시, 25명은 조금도 원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책적 고민, 교육적 노력에 의해 나온 학급 인원인 것도 아니다. 단지 한국 산업구조의 변화 경로를 그대로 따라온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경로를 따라오는 동안 교육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교육의 변화를 위해 피땀 흘린 교사와 아동, 학부모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육의 진행 경로로부터 달아나지 못한 증거들만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뿐이다. 지금, 이대로 교육 현실을 좌시할 수 없다는 학급당 인원수 감축의 요구는 집단적 이기주의인가? 인구절벽으로 다가올 교사 적체 문제를 방기한 비이성적인 판단인가?


인구가 줄어드는 원인은 무엇일까? 태산같은 교육비과 칼바람같은 학력경쟁을 감당하지 못해 아이를 낳지 못하겠다는 비명도 이미 수십년전부터 있어왔다. 노동집약적 산업구조를 벗어난 8,90년대에 대대적인 교육투자를 통하여 교실당 인원수를 대폭 줄이고 교육의 질을 높였다면 이처럼 인구절벽이 급하게 찾아왔을까? 그리고 지금 당장에도 도저히 아이들을 지킬 수 없으니 제발 학급당 인원수를 줄여달라는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지금 아이를 낳으라고 젊은 세대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고작 교원수 관리라는 한 없이 비교육적인 정책기조로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콩나물교실의 정책당국인가 2021년 작금의 정책당국인 것인가? 아차. 말을 써놓고 보니 정확히 해방 후 50년간 발생한 온갖 한국교육의 병폐들이 "교원 수급과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발생한 일들 아니었던가.


교사의 이기주의를 논하기 전에 얼마나 국가가 교육 문제에 무관심하였는지, 왜 그런 정책기조가 이어져왔는지 따져야 한다. 한국 교육은 산업화의 주체가 아닌 객체요 그저 노동력을 공급하는 생산기지에 불과했다. 산업구조가 변하고 노동자 생산이라는 교육목표의 시효가 다하자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역량중심교육이라는 신자유주의적(역량 중심 접근법은 1970년대 미국의 기업들의 경영관리를 통해 발생했다.) 정책기조를 내밀면서도 정작 역량을 함양할 수 있는 정책지원은 커녕 뻔뻔히도 일제고사를 유지하며 보수적 지식중심의 교육관과 계급재생산의 구조를 용인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교사는 아동을 가르친다는 것일까.


경로의존성. 한국 교육이야말로 가장 강고한 경로의존성의 희생양이다. 대영제국 시절의 자부심을 고이 간직하며 차량좌측통행 제도와 자동차 산업구조를 그대로 살려두고 있는 영국. 찬란했던 세계2위 국가의 자긍심으로, 그 시절 도장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일본.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교육현실에 겹쳐지는 것은, 1950년대 법령으로 지정된 것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는 크기의 교실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아동 중심의 교육은 전혀 가능하지 않은 학급당 인원수를 받아안은채로 교육하며, 역량중심이라는 허울을 쓰고 실제로는 암기교육을 지속하고 일제고사로 강제하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일본의 오늘을 비웃을 수 있을까?


학급당 학생수 20명(유아 14명) 상한을 법제화하는 청원이 전교조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것은 교사노동자의 직업이기주의가 아닌, 당장의 위급함에서 비롯된 단견이 아닌 우리 교육정책의 본질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것은 변혁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우리는 이 70년간 단 한번도 이탈된 적이 없는 비인간생성의 경로를 벗어날 것인가?


✍️청원 1. 학급당 학생수 20명 상한을 위한 초중등교육법 개정

http://bit.ly/20class20


✍️청원 2. 유아 학급당 학생수 14명 상한을 위한 유아교육법 개정

http://bit.ly/14kids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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