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에 고기 그리고 채소로 만든 육수
오늘은 일이 좀 꼬였다. 바깥양반은 모성보호 탄력근무를 하기로 하고 3시에 퇴근 예정을 잡아놨는데, 그만 방문하는 손님이 있어 퇴근이 4시로 밀렸다. 3시 30분에 영화를 예매해 같이 보려던 나는 그 바람에 영화를 포기했다. 그 영화, 오늘이 마지막 개봉 스케쥴이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유튜브로 결재를 해서 봐야할 판이다. 뭐어, 꼭 극장에서 볼 영화는 아니었어.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바깥양반은 혼자서라도 보고 오라고 했지만 그럴 경우 바깥양반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영화관 근처까지 와서 한시간 이상 멍을 때려야 할 판이라, 포기다 포기.
대신 한시간이나마 일찍 퇴근을 했으니 근처에 가고 싶은 카페라도 가자고 바깥양반은 말했고, 원래 영화를 보고 곱창을 먹으려던 계획이 뒤바뀐 것이므로 나는 무슨 메뉴를 먹을지 생각해보라고 바깥양반에게 말했다. 얼마 뒤, 나는 "고기국수, 아니 멸치고기국수"를 말했고, 쿨 하게 오늘의 제안은 통과. 비가 온 뒤의 화창한 하늘과 함께 화창하고 시원한 멸치와 고기의 국물, 그것을 말이지.
그래서 집 앞 채소가게에 들렀다. 당근과 애호박, 대파에 양배추까지 샀는데 단돈 8500원. 괜찮은 가격이다. 집에 와 홀홀 옷을 벗어던지며 손을 닦고 바로 저녁 준비에 들어간다. 육수를 한시간 이상은 어쨌든 끓여야 할 테니 성실하게 움직여야 한다. 채수를 빨리 내기 위해서 3mm 내외로 칼질해 냄비에 우수수. 호박이야 나중에 넣어도 되긴 하지만 손에 잡히는 순서대로다. 호박도 얇게 썰어 넣고 대파까지 흰 쪽으로 넣었다.
그리고 멸치 내장을 따로 떼어서 넣으면, 채수 쪽은 마무리.
오늘의 멸고국수의 경우 멸치와 고기의 국물이 각각의 향을 그대로 살리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육수를 각각 내서 나중에 합치기로 했다. 제주도에서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국수집들은 저마다의 멸치육수와 고기육수의 비율이 있을 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내 나름으로 열심히 해본다. 찌개를 하기 위해 덩어리째로 소분해 얼려뒀던 돼지갈빗살에 소금, 후추, 그리고 마늘은 나중에 국물이 텁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지지 않고 칼질해서 넣었다.
요 과정에서, 멸치 똥을 뺀다고 국물용 대멸치를 손질하다가 그만 손에 멸치가시가 여럿 박혔다. 글을 쓰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리고 아침을 먹은 설거지를 이제 하고, 채소 손질한 싱크대도 정리하고 겸사겸사 행주들도 다시 짜서 걸고 해도...시간이 많이 지난 상태인데도 아직 육수를 내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오늘 마침 똑 떨어진 화장지를 사러 집을 나와 마트에 가서 고기 구경도 한참 하고, 세일하는 수입산쇠고기로 만든 언양식불고기도 하나 사고 바깥양반 드실 음료수도 마시고, 할튼 여유있게 장까지 보고 왔다.
그러고 나니,
아차. 방금 고기육수까지 해놓고 나서 채소멸치육수 쪽에 무를 막판에 추가했었는데 실수다. 무의 단맛이 너무 강한 육수가 나와버렸다. 게다가 멸치가 좀 부족했나? 육수에서 멸치의 바다내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무에 잡아먹힌 것인지, 당근에 대파에 호박, 채소가 전체적으로 너무 많았던 것인데 유유자적 시작한 저녁 밥상이 유유자적과 멀어지는 사태.
우선 멸치를 추가해서 밸러스를 조정하고, 돼지를 냄비 속에서 계속 뒤집으면서 고루고루 익게 했다. 그러고 나서 물을 추가한 뒤에 또 충~분히 물이 줄었을 때, 마침내 두 육수를 합쳤다.
그 다음엔 일사천리로 한쪽 빈 화구에 예산국수를 삶기 시작. 예산국수가 이게 마지막이다. 바깥양반 입덧 초창기에 혼자서 맛나게 먹던 국수가 이별이라니 섭섭한데- 하는 생각. 입덧 이야기가 나와서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어제 바깥양반은 스팸짜글이에 스팸 구이, 그리고 계란후라이를 뜨순밥과 드셨는데, 스팸 정도 좋아하는 반찬이 있을 경우 쌀밥을 드시고, 그러지 않다면 쌀밥은 여전히 안내키신단다. 그러니. 아직도 입덧 핑계로 집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자꾸 이런 저런 다른 음식을 찾는 너.
그런 나는, 면을 씻어서 미지금한 상태에서 수분을 빼면서 냄비의 육수를 봤는데 뙇.
음-. 너무 진하다. 최종적으로, 투머치육수다. 모든 문제의 원흉은 무 인것으로 생각된다. 고기 쪽 육수는 몇번 해본 경험이 있어서 육수 비율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멸치채소육수 쪽이 문제다. 무를 넣는 바람에 멸치가 과하게 들어갔고, 멸치에서 쓴맛이 가볍게 나는데 문제는...그렇게 추가 추가 된 재료들이 너무 묵직한 육수를 만들어버렸다는 것. 이걸 원액이라고 치고 희석을 해서 가볍게 소금 조금 뿌리면 딱 될 것 같은데, 아쉽다. 다음엔 무를 빼고 적당량의 멸치만, 그래서 가운데에 고기 육수가 자리를 잡고 위에 멸치 내음이 사르르 놀려진 정도면, 그리고 뒷맛을 채수가 잡아주면 그림이면, 괜찮겠네.
"수달이!!!"
"응 일어났어."
바깥양반이 두번째 부름에 답한다. 나는 과하게 묵직한 국물을 그릇에 담아 일단 음식을 내긴 했다. 너무 진한 육수긴 한데 그래도 국수와 먹으면, 파가 부려지면, 김치와 먹으면, 또 다르니까. 그런데,
"응 맛있어."
"맛있어? 너무 진하지 않아?"
"아냐 괜찮아 사먹은 거랑 비슷한 느낌이야."
...어-...그러니까...바깥양반은 맛있다고 국물을 훌훌 마신다. 아이쿠 뭐 그래. 무 육즙을 희석한다고 그만 멸치범벅이 된 무거운 육수이지만, 덕분에 핏물도 안뺀 고기의 잡내도 잘 지워져있고, 파를 추가로 뿌려서 국물과 함께 먹으니, 무거운 국물이 파의 향긋하고 매콤한 맛과, 잘 어울리긴 하네. 그래 이정도면, 또 잘 먹은 저녁이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까지 한 나는 남은 육수를 용기에 남은 뒤, 육수 재료들에 물을 한번 더 부어서 한번 더 육수를 내었다. 이렇게 하면 가벼운 맛이 배어나올 것. 바쁘게 저녁을 차리느라 뻘뻘 흘린 땀을 씻어내고, 빨래를 널고, 바쁘게 이것저것 한 뒤에 충분히 우러나온 2차 육수를 맛을 본다. 가볍다. 채수는 다 뽑히고 나중에 넣은 멸치에서 국물이 나와서, 딱 알맞은 가벼운 육수다.
두 국물을 합쳐 완성본을 만들고, 오늘의 저녁상을 마무리했다. 벌써 늦은 시간. 저녁이 바쁘게 흘러갔다. 바깥양반은 저녁을 마치고 "또 해주세요!"를 외쳤으므로, 이 완성된 육수에 고기 삶은 물만, 되도록 가볍게 만들어서 합치면 또 한끼의 즐거운 저녁식사가 되겠지.
두가지 문제가 남았다. 결국 난 8인분의 육수를 만들어버린 셈이고, 이번 휴가 때 먹었던 고씨네천지국수…랑 비교하면 좀, 많이 부족한 맛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