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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20. 2021

생각보다 대중적인, 예상보다 철학적인 <프리가이>

분명한 건 감독이나 각본가가 "찐"이라는 것

 우리가 영화를 즐기는 이유가 여러가지 있지만 "내 일상 속에서 가질 수 없는 경험에 대한 대리충족"이라는 측면을 빠트릴 수 없다. 외계행성에서 붉은색 용을 타고 종족의 구원자가 된다거나 미래에서 온 로봇과 함께 인류를 종말전쟁에서 구해낸다거나. 그러나 영화산업이 어언 100년을 넘어가는 오늘날, 영화가 주는 경험이라는 것의 생소함도 나날이 드문 것이 되어갈 수 밖에 없다. 2002년 <스파이더맨>이 나왔을 당시 사람들은 CG가 만들어낸 완전히 새로운 스턴트 액션을 보고 환호했지만, 2020년대 히어로물의 스펙터클은 더 이상 센세이션이 아니라는 이야기. 따라서, 우리가 영화에서 찾는 새로움은 다시금 "이야기"로 돌아온다. 기술이 현실을 완전히 복제할 수도, 또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는 있어도, 기술이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할 순 없으니까. 아직은.


 그런 점에서 <프리가이>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즐겁고 좋았던 점이, 5분 후를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이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내러티브로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었다면, <프리가이> 역시 그렇다. 완전히 새로운 내러티브, 그런데 그것이 기술과 만나서 이제는 진부해진 시각적 스펙터클의 문법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게임 미디어 산업이 대중화되면서 이런 장르의 영화도 <레디 플레이어 원>을 필두로 속속 개발되어가고 있는데 글쎄, 한 10년 뒤엔 게임무비라는 장르가 대중화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프리가이>는 선구적인 시도라고 할만하다. 게임무비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대중성에서, 그리고 편의성과 심도라는 측면에서까지.


 이야기는 이렇다. "GTA(세계 최고 매출을 올린 고퀄리티의 오픈월드 세계관 게임)와 유사한 폭력적인 게임의 한 캐릭터가 어느날 모종의 사건으로 "인격"을 얻게 된다. 0과 1로 이루어진 코드 주제에 인격이라니 말도 안되지.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가 현실의 개발자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어떤 거대한 악의 존재에 맞서서 마침내 해피엔딩."


 이 요약문구만 보면 굉장히 흔한 이야기다. 메이저 영화산업계에서야 선구적인 시도일 수 있으나 서브컬쳐계에선 게임이 워낙 주류 장르이다보니, "게임 속 인물이 현실을 구하는 영웅이 된다"라는 내러티브조차 식상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설정이 대중적으로는 굉장히 Nerdy하고 오타쿠스럽게 느껴진다. 청소년들이 너 나 없이 게임을 좋아하는데도 본격적인 게임무비 장르가 개발되고 있지 못한 것,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 완성도에 비해서 큰 트렌드가 되지 못한 것도 게임무비가 갖고 있는 대중성의 결여와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리가이>는 게임무비 치고는 굉장히 대중적이다. 물론 극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일단 주인공이 라이언 레이놀즈인데다가,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로부터 입소문도 괜찮고, 모두가 즐거워할만한 패러디도 아주 많다. 그런데 이야기는 꽤나 리얼리티에 기반해 있고 오타쿠스러운 특징은 이야기 바깥에 시작적으로 부호화되어 숨겨져있는 형식이기 때문에(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의 복장이 특정 게임을 상징한다거나) 거리감도 크지 않다. 게다가 이야기도 착하다. "올바른 삶"에 대해 설교하지 않고 풀어내는 이야기.


 게다가 놀랍게도, 철학적이다. "인격을 얻은 게임 캐릭터"라는 질문이 존재와 자아로 옮겨간다. 스피노자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질문이 구체화되어, 적절한 시점에 주인공 사이에 온간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여러 지점을 오마쥬하고 있는 <트루먼쇼>와 비교하면서 진지하게 토론을 할 수도 있다. <프리가이>이 담고 있는 철학이 굉장히 독특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관람 과정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트루먼쇼>와의 비교나 철학 코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점차 해소되고 오히려 장점으로 발전한다는 것. 이걸 위해서라도 반드시 두 영화를 함께 보고 고민해보면 좋을듯싶다.


 당연히 게임무비이므로 숱한 패러디가 난무하는데 그 점이 후반부에 조금 아쉽다. 대세 장르인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록스>를 후반에 좀 더 눈에 띄게 배치했더라면 어린이들의 수요를 끌어모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게임에 익숙한 성인층부터 마인크래프트를 즐기는 초등학생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이니 이왕이면. 이부분만 제외하면, 놀랍도록 풍성하고 또릿하고 창의적인 게임무비다. 쓰레기통에 한가지 오브젝트만 가득 채워져 있는 디테일에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다. 아주 아주 여러 사람이 좋아할만한 게임의 패러디를 비롯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래부터 깊이있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0과 1 밖에 없는 기계코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설정. 그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설정의 개연성이 확보가 되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복잡해지는 인물들의 관계. 마지막에 사랑을 통하여 중요한 갈등들이 해결되는 드라마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시작부터 결말까지 이렇게 일관되게, 창의적으로, 버라이어티하게 연출되는 영화. 정말 드물다. 확실한 건 감독과 제작진, 각본가 모두 다 "찐"이라는 것이다. 찐으로 너드거나 찐으로 오타쿠거나, 찐으로 능력자들이거나.



p.s. 카메오로 채닝 테이텀은 너무 강력한 필살기였다. 그리고 PC적인 관점에서 좀 후진 점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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