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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Sep 01. 2021

교육은 어떻게 인간을 해방하는가, <나는 말랄라>

탈레반에 점령된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 그리고 교육.

 주제넘게도 2010년대 초 쯤에 "중동 여성의 히잡이나 부르카와 같은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보편적 인권기준에 비추어 옳은 행동인가, 그들의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문화 상대주의에 기반하여 올바른 행동인가?"하는 논제가 학생들을 사이에 돌았던 적이 있다. 막 우리나라가 경제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조금씩 세계화되는 추세에서 자연스럽게 나올법한 질문이었다. 코로나 방역, BTS나 아시아를 넘어선 한류컨텐츠 등 2020년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아득한 일이지만 불과 10년 전인 201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는 소위 지구촌이라 하는 세계화, 국제화의 시류에서는 한참 뒤쳐진 형편이었다. 그런 문제는 당시 다문화가정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낮은 인식수준으로도 잘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여성인권을 짓밟는 이슬람의 전통이 과연 히잡 하나에 그칠까?" 라거나, "여성인권 개선이 우선인가 과학이나 문화 등 다른 영역에서 드러나는 이슬람의 전근대적 습속을 깨트리는 우선이 될까?"와 같은 반박을 떠올려본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학생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는 논제였다. 히잡이든 부르카든,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여성인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지극히 서구적 관점에서 여성탄압의 상징적인 이미지에 함몰된 피상적 단견에 불과했다.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정체성의 공간, 그리고 중동이라는 단절과 고립의 공간에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외부인의 시선에서 그처럼 재단되지 않는다. 사회공동체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든, 국제화든 외부세력에 의한 폭거를 넘어서지 못한다. 


 아들 부시 행정부 시기 벌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딱 그랬다.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퇴출로 이어졌고,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적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희생이 뒤따랐다. 물론 언제나 그 배경에는 중동의 석유자원에 대한 혐의가 있었다. 미국의 민주주의 이식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허구적이었던 것이었는지는 9.11 테러로부터 딱 20년이 지난 2021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에 의해 장악된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난다. 부패한 아프가니스탄의 "민주정부" 요인들은 재산을 꾸려 누구보다 빨리 해외로 도피했다. 탈레반의 손아귀에 떨어진 민중들은 이제 "이교도에게 부역한 자들"이란 낙인이 언제 자신에게 떨어질지 모르는 공포와 함께, 근본주의적 남성권력집단의 살벌한 폭력성 아래 숨만 죽이고 있는 형편이다. 


 중동과 이슬람은 무엇일까. 언제나 그렇듯, 과거는 현재를 보는 유용한 거울이다. <나는 말랄라>는 파키스탄 북부의 스와트 계곡이라는 천혜의 관광지의 한 시골 도시에서 자란 주인공이 탈레반 조직에 의해 고향이 파괴되고, 내전으로 난민신세가 되고, 무단통치의 폭거 속에서도 자유와 교육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다가, 끝내 테러의 피해자가 되어 총상을 입고, 영국으로 이주해 살게 된 이야기를 담는다. 1980년대부터 파키스탄과 아프프가니스탄을 취재해온 언론인 크리스티나 램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어 상당히 깊이있는 정치사회적 배경까지 함께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덕분에 한 소녀를 둘러싸고 시시각각 나라가, 도시가, 지역 공동체가 변해가는 맥락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말랄라의 시각에서는 가정과 골목길의 풍경, 램의 시선에서는 파키스탄 정부와 탈레반의 행보, 공식정부와 탈레반 자치정부(참칭 수준이지만)의 권력투쟁을 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품게 되는 생각은 "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민주화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말랄라는 파키스탄 소녀이지만,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이기도 하고 이슬람국가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문화적으로 여러 공통점이 있다. 말랄라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어지간히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시 말해, 2001년에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20년 뒤인 지금 처참한 실패로 드러났는가? 왜 아프간 정부는 자생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그 짧은 시간만에 탈레반에게 정권을 내어주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 한권의 책은 상당히 깊이있게 들려준다.


 낳아준 엄마를 포함하여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하는 성별인 "여자"로 태어나 족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할 운명이었던 말랄라. 평생 이슬람 문화권의 한가운데에서 살아온 그녀로부터 직접 듣는 중동의 전근대성은 우리의 인식수준을 완전히 넘어선다. 파키스탄 산악지대에 존재하던 중앙집권형의 왕국이 무너진 뒤 외세의 개입과 종교갈등으로 태어난 파키스탄에서 "국가"는 시민의 일상의 삶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 산맥과 계곡으로 가로막힌 중동의 산악지대에서 공동체는 씨족과 부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국가는 학교와 도로 등 기반시설에도 소극적이다. 인도와의 수차례 전쟁으로 소진된 국력은 특히나 북부의 산악지대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적 정부의 통치력이 닿지 못하는 곳에선 자연스럽게 가부장제와 이슬람 전통이 곧 정부가 되었다. 각 지역으 대표와 족장이 각종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의 주체이고, 이슬람의 율법이 곧 "법률"인 것이다. 어떤 손님도 거부하지 못하고, 결혼 시 거액의 지참금을 끌어오느라 파산지경에 처하고, 학교의 봉금은 전액 학부모에게서 나오는,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여성은 교육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이런 땅에 과연 현대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을까? 단언컨데, 외부의 지원과 조력은 파키스탄 공항에 착륙하는 그 순간부터 조각조각 분해되어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문턱을 넘어서기 전에 가루처럼 흩어져내릴 것이다. 


 그곳, 스와트 계곡의 밍고라라는 도시에서 말랄라는 아버지의 헌신적이고 용감한 교육을 통하여 자유인의 씨앗을 품게 된다. 책이 말해주는 두번째 교훈은 "자유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친 말랄라의 아버지 유사프는 극심한 말더듬이 버릇을 딛고 여러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휩쓴 전적이 있는 나름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수년간 밤낮없이 일하는 한편 각종 지역단체의 대표로 활약했다. 아버지부터 더할 나위 없이 드높은 주체의식과 실천의 삶을 살아왔으니, 그 삶을 장녀로서 보고 배워온 말랄라는 자연스레 강력한 주체성을 품게 되었고, 공부도 잘해서 반에서 늘 1등을 다투었다. 물론 그런 말랄라의 높은 성적이 학교 이사장인 아버지를 통한 특혜라는 약간의 질투가 뒤따르긴 했지만.


 단지 공부를 잘하던 주관 있는 아이였던 말랄라가 자유와 해방의 씨앗에서 곧 상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다름아닌 탈레반의 스와트 점령이었다. 산악지대에서 힘을 길러온 탈레반들이 지역 라디오 방송을 토대로 시민들의 지지세를 얻고, 마침내 야금야금 일상을 침윤하더니 마침내 총칼을 앞세워 완전히 스와트를 장악한 것이다. 탈레반은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내쫓았다. 누구보다(늘 반에서 1등을 다투었으니) 공부와 학교를 좋아했고 자유의지가 넘쳤던 말랄라는 당연히 그에 항거하여 나이를 속이고 하급생 반 수업을 들을 정도로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정책에 거부를 표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삶을 바꾼 것은 외신 블로그에 익명으로 탈레반 점령 치하의 소녀들의 삶을 기고한 것, 그리고 그 기고를 토대로 다큐멘터리와 다른 여러 외신의 취재에 응한 일이다. 말랄라는 더욱 유명해졌고, 더욱 위험해졌다. 말랄라도 그녀의 아버지도, 언제나 어디서나 죽음이 닥쳐올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또 부정했다. 그들은 매일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매일 학교에 나갔다. 


 이것이 책의 세번째 주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저 한 사람의 스와트 주민인 말랄라에게 교육은 임금노동자로서 소득 향상의 수단도, 지위상승의 수단이나 학력이라는 상징자본 획득의 수단도 아니었다. 어린 소녀는 그저 교육받길 원했고, TV나 영화에서 보듯,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되길 원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로서 교육을 인식하고 있었다.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오로지 즐거움이었고, 그녀가 이름을 딴 파키스탄의 영웅 말랄라나 피살된 정치인 베니지르 부토와 같은 삶은, 그녀가 교육을 통해서 소망하는 바가 아니었다. 말랄라는 오로지 교육 그 자체를 원했다. 그리고 그 소망 하나를 위해 죽음과 마주하며 매일 학교에 등교했다. 그리고 마침내 탈레반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다시 서두의 질문을 옮겨온다면, 이슬람 여성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히잡을 벗기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이 다시 탈레반에 점령된 마당에 말이다. 탈레반은 쇼핑몰의 여성모델 사진에 회칠을 하고, 병원에서 여성 환자를 몰아내고, 여학생들의 학교는 파괴해버릴 것이다. 말랄라의 스와트에서 그러했듯. 고작 겉으로 드러난 구속구 하나를 걷어내는 일이 아니라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 치료받을 권리, 노동과 사회생활을 할 권리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인간다운 삶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살아서, 살아남아, 희망의 상징이 된 말랄라의 사례를 통하여 들여본다면 말이다. 말랄라는 아직도 자신의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녀의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슬람과 교육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때, 무엇보다도 문화재생산의 기지로서 학교가 갖는 역할은 탈레반에게 무엇보다 큰 위협이다. 학교는 율법이 아닌 논리를, 섭리가 아닌 인과관계를 가르친다.(복종을 가르친다는 점은 학교나 이슬람이나 대동소이하다. 유감이다.) 남녀의 동등한 삶, 세계시민으로서의 무슬림 따위를 주입하는 위협, 그러니 극단주의 무슬림에게 학교가 적대시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학교가 그저 지식전수나 기술습득의 경로로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서 공동체를 생산하고 유지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초등부터 중등교육까지 장기간에 걸쳐 현대적인 교육기관에서 보편교육이 실행되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필요에 따라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적어도 두 세대에 걸쳐 그 학교교육을 통해 사회구성원이 생산되어야 할 것이다. 보편교육의 세대전승은 서구가 어떤 지역을 민주화하거나, 현대화한다고 말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


 그런 약속이 지켜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말랄라가 탈레반에 의해 중세 이슬람 가치관을 지닌 폭동집단에게 둘러싸였을 때, 무엇보다도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생명의 위협에 끝없이 두려워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해방은 싸움을 멈추지 않아야만 찾아온다. 말랄라에겐 자유를 위한 투쟁의 동기가 그저 교육의 권리였을 따름이고, 고작 학교에, 교작 공부의 즐거움에 그녀는 목숨을 걸었다. 고작 학교에, 목숨을 걸어서 그녀는 마침내 죽음에서 되살아나 해방을 맞이했다. 


 교육해방을 위해 우리는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바라보며 개강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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