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판데믹, 메타버스와 <학교 없는 사회>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

by 공존

COVID-19 판데믹 속에서 일상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백신이 발명되고, 마스크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한 국가가 있는가하면, 끝내 올림픽은 개최되었다. 무엇보다도 치명율이 획기적으로 낮아져, 이제 뉴스에서 국내 코로나 사망자 소식을 듣는 것이 인과관계조차 증명되지 않은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자(로 추정된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그 중에서도 학교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2020년 3월은 전세계적으로 학교의 필요성과 그 대체 불가능함을 깨닫는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각 나라로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집단생활시설인 학교에 청소년과 아동들을 모아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잠시라도 학교의 기능을 정지시켜둘 수는 없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1개월여 개학을 유예하며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했고, EBS 온라인 클래스와 Zoom이라는 플랫폼을 채택하여 온·오프라인 혼합형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기 학교 현장의 모습이란 마치 건물을 세우면서 동시에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같았다. 대강의 원칙과 최소한의 지원이, 온라인 교육과정을 접목한 전면 개학 시점에 교육부가 학교에 제시한 것의 전부였다. 정책의 공백은 현장에서 모두 실체화되고, 문제점과 대안이 동시다발적으로 도출되었다. 등교수업과 온라인수업을 할 인원을 정하는 것도 학교의 몫이었는데, 일반적으로 학년별로 교차등교를 실시했지만 학급별로 교차 등교를 하거나 출석번호 짝수와 홀수로 교차등교를 추진한 학교들도 있었다. 각자의 취지와 장단점이 있었지만 “온라인 수업도 정규교육과정으로 인정한다. 출석은 하루 중 한시간만 하여도 하루의 출석 전체를 인정해준다.”라는 큰 틀만 확정된 상태에서 학교가 보여준 모습들은 이렇게 천차만별했고, 이처럼 다양한 온라인 교육과정 속 학교의 모습에서도 수업과 평가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큰 과제로 학교에, 교사들에, 교육전문가들에게 남겨졌다.


온라인 교육과정은 현장의 교사들에게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듯했다. “컨텐츠형수업(온라인 플랫폼에 수업자료를 업로드하고 학습자가 접속해 학습을 진행한 뒤 과제를 제출하는 형식의 비동시적 교육과정)”은 정규교육과정이라 부르기 민망한 학생관리의 부재, 그로 인한 학력결손을 초래했다. 초등교육에서의 “돌봄”의 문제만큼이나 중등교육에서의 “양육”의 문제는 중요한데, 학생들의 연령이 증가하고 학력격차가 학령과 함께 점점 증가하는 중등 단계에서 학생들이 학교 교실에 머물러 있는 것, 학폭과 비행으로부터 안전하게 생활하는 것, 단체생활을 통하여 인성과 사회성을 함양하는 것은 매우 핵심적인 학교의 기능으로 요청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교육과정은 그 개방적인 형태로 인하여 출결관리는 물론 수업지도조차 정상적으로 이루어내지 못했다. 한 중학교에서는 가출한 학생 대신 학부모가 지속적으로 온라인 클래스에 출석 보고를 하고 수업 과제를 제출하는 사건도 있었다.


Zoom 등의 회의실 기능을 지원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실시간 쌍방향 온라인수업” 역시 큰 차이는 없었다. 한 학교에서는, Zoom으로 매 시간 출석체크를 하고, 카메라를 반드시 켜도록 하여 만일 카메라를 켜지 않을 시 해당 수업을 결석처리한다고 가정통신문을 배부하였다가 학생이 지역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하여 철회한 사례도 있다. 학교에서 교육적 목적에 따라 카메라를 켜는 것을 강제하지 못하도록 지역 교육청이 제제를 가하는 것이 민주적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극히 일부의 사례이긴 하지만, 해당 학교에서는 그로 인하여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서 출석 호명에 답하고 게임을 하거나, 자기 집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거나 병원에서 수업을 듣거나 하기도 했다. 물론 교사들 역시 온라인 수업을 집에서 하기도 하고, 카페에서 하기도 하고, 자가용 안에서 하기도 하는 등 전국적으로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장면들을 연출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시작된 온라인 교육과정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시행 2년째,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혼란 및 사건사고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듯한 현재까지의 경험에 대하여 학생과 교사에게 물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교실 수업에 비하여 학습효율이 낮다는 점에 동의한다. 온라인 수업의 단점이 여럿 있지만, 상술한 바대로 각자의 공간에서 수업이 이루어지는 특성으로 인하여 교사의 관찰이 소통과 피드백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이고 그 다음으로는 모둠활동 및 수업재구성이 극도로 제한된다는 점이 꼽힌다. 온라인 교육과정 속에서 교사는 배움의 퍼실리테이터가 아닌 고전적인 지식의 전수자로 회귀하여 수업자료 및 과제를 제작하고, 교과서의 수업 진도를 커버하여 진급 및 진학의 근거자료로 활용될 성적자료를 산출하기까지 학생들을 이끌어가는 길잡이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온라인 교육과정은 실제로 학교 교육이라 불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나, 이에 대한 답변 역시 논쟁적이다. 학교 교육이 정지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시도되었고, 지속되고 있는 정책이다. 공정한 평가가 어렵다. 현재까지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잠재적 교육과정을 형성하는지에 대하여 앞으로 많은 연구가 수행되겠지만, 집을 지어나감과 동시에 설계도를 그려나가야 했던 긴박한 상황에서 본래의 학교교육의 형태를 온존하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했다면,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리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온라인 교육과정은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이것은 2021년 현재에 매우 큰 질문으로 돌아온다. 고등학교의 경우 코로나 판데믹으로 도입된 온라인 수업이 정규교육과정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근거 삼아 “교육과정 클러스터” 역시 전면 온라인 운영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교육과정 클러스터”란 2015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학교의 교과목 개설을 다양하게 하는 “고교학점제”의 마중물 구실을 하는 정책으로서, 단일 학교에서 수강인원을 충족하지 못하는 교과목을 인접학교들이 클러스터를 구성해 공동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그를 정규교육과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등학교의 경우 3년간 180단위의 교과목을 이수해야 하는데, 교육과정 클러스터를 통해 그중 일부를 이수할 수도 있고, 180단위를 초과하여 이수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대학 입시에서의 학생부종합전형이 교과이수상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180단위를 초과하여 교육과정을 이수할 경우 수험생에게 상당히 이점이 될 수 있고, 교육과정 클러스터를 온라인 교육과정으로 이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현 상황은 그로 인하여 정규교육과정의 초과이수가 중요한 학력경쟁의 변수로 부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교육과정 클러스터를 최초로 도입하고 2016년에 전면 확대운영한 경기도교육청은 한 학교가 20여개의 교육과정 클러스터를 개설하여 학력경쟁을 부추기는 사례를 발견하고 제제한 바도 있다.


이것은 매우 큰 아이러니다. 온라인 교육과정이 도입됨으로써 많은 학교에선 학력결손, 교육의 공백을 실감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온라인 교육과정 도입을 활용하여 학력경쟁을 강화하고 있다. 마침 서울 15개 대학이 입시에서 수능 정시 선발 비율을 10% 가량 늘리기로 한 상태라 교실과 정규수업에 얽메이지 않아도 되는 수능 중시 유형의 입시생들은 온라인 수업에는 실제로 거의 참여하지 않고도 교육과정 이수를 인정받는 이점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잃었는가에 대하여 학생의 관점에서 답을 찾는다면, 학력은 택하고 배움은 버릴 수 있는 길이 크게 열렸다. 이것이 판데믹에 대처하기 위하여 학교를 연 결과라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말하여 학교교육의 전통적인 형태는 손실되었다. 그러나 학교교육의 손실을 보완하긴 커녕 온라인교육과정은 그 손실을 정당화하고, 정당화를 통하여 더욱 손실을 확대하는 한편 이익 당사자들 간의 부조화는 확대시켰다. 판데믹이 종료되면 현재의 학력손실은 복구되고 교육의 본래 목적은, 제도적 정당화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실현될 수 있을까? 전망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기술의 발전이 극히 짧은 시간에도 패러다임의 변화를 초래해,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었다. 2000년대 초에 등장했던, “아바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형태가 클라우드 컴퓨팅과 디스플레이 등 발전된 기술에 힘입어 더욱 현실세계에 근접한 형태로 전세계인을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구현되고 있다. 역사를 통해 보아왔듯 새로운 기술에는 자본이 투자되고, 자본은 가치를 부여한다. 비트코인이나 명품소비처럼 메타버스라는 기술과 자본의 접목은 인간의 인식과 욕망의 변화를 초래한다. 언택트가 배달음식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불렀듯, 메타버스와 유사한 비대면 커뮤니케이션 산업도 앞으로 크게 변화할 것이다. 판데믹 이전의 비대면 교육 프로그램들도 온라인 교육과정과 메타버스의 결합을 통하여 크게 교육을 바꿀 것이며, 시간적 공간적 한계에 묶인 학교교육의 본질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도 계속될 것이다.


“학교 없는 교육”이 판데믹으로 인하여 실체화된 오늘과, 메타버스가 변화를 예고하고 있는 내일 사이에서 이미 가치는 훼손되고 제도적 정당화는 강조된 학교교육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혹은, 이러한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만일 온라인 교육과정이 학교교육을 훼손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본래의 학교교육”은 과연 정당하고 가치로운 것이었던가? 교육은 학교에서 본래의 형태로(만일 본래의 형태라는 것이 있다면) 실현되고 있었을까?


이반 일리히의 Deschooling Society는 1971년 출간된 이래 <탈학교 사회>,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육론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학교제도로부터 해방된 사회 만들기> 정도가 적절한 번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적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평생 고수한 그는 사회제도가 인간의 삶을 왜곡하는 한편 자본예속을 강화한다고 진단했다. 문명의 발전으로 의료, 교통, 교육, 정치 등이 제도화되었지만 이는 곧 자연 상태의 인간이 일상을 통하여 향유하던 정당한 노동(work)의 가치가 박탈된 것을 의미한다. 자율적, 자연발생적인 다양한 노동의 요구가 제도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것은 곧 제도에의 예속을 뜻하기에 현대의 인간은 스스로의 노동에 대하여 사고할 기회도, 결정할 권리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리히에게 학교 교육은 매우 핵심적인 반인간적 제도로 인식되었는데, 그것은 학습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행위양식이 학교 교육을 기준으로 분류되고, 학교교육을 벗어난 배움 활동이 부정되거나 망각되며, 그로 인하여 평생에 걸쳐 발생하게 되어 있는 자율적인 배움, 인간의 본질이 제도적 통제에 의해 훼손되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교육의 제도화는 국가운영의 효율화 관점에서 12세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왔지만, 사회공동체 관점에서는 학습의 비효율화를 초래한다고 일리히는 보았다. 당장 학교 교육은 사물 및 현상에 대한 교육주체의 학습 동기와 필요성보다는 연령별 교육과정을 채택하여 시기별로 배워야 할 것들을 구성하여 그것을 강제하고 있다. 학습자 자신의 욕구에 따른 학습을 넘어선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교육이 있을까? 또한 학습자 간의 연대를 통하여 공동체 안에서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이 수시로 바뀌는 형태보다 학교조직은 효율적일 수 있을까?


우리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 이를 적용해 보자. 집을 지으면서 동시에 설계도를 그리던 2020년 1학기 온라인 교육과정 전면 도입 시기 교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온라인 수업을 위하여 교사들에게 보다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라는 것이었다. 당장 학교에서 학생들과 만나며 개학식부터 수업 시간 시간마다, 또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 시간마다 온라인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육청은 무엇을 토대로 교사들에 대한 지원방안을 마련하는가? 외국의 사례를 끌어와야 할까? 연구선도학교를 지정해서 교육모델을 도출할까?


학습의 주체로서, 국가 주도의 선발과정을 통해 인정받은 교육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현장에서 온라인 수업을 추진하고 있는 교사 자신들 말고 누가 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을까. 온라인 수업에 대한 교사 집단의 태도는 학교 교육의 제도화로 인한 주체의 타율화를 잘 보여준다. 교사들은 온라인 수업이라는 학습 과제, 교사 커뮤니티, 지식 교류, 제도적 지원까지 모두 갖춘 핵심 집단이다. 학력결손과 격차의 확대, 돌봄과 양육의 문제, 일방향적 지식중심 수업으로의 회귀 등 판데믹 이후 나타나는 교육사태들에 대한 적극적인 협의와 모색이 교사들 사이에서 터져나와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온라인 교육이 열어낸 교육 문제의 제도적 정당화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앞으로의 기술변화 및 새로운 정책들에 따라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만일 온라인 교육과정이 교사들, 교육연구자들의 탐구 과제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동일한 질문들이 판데믹 이전 학교 교육에도 던져져야 한다. 학교 교육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한 예로 일리히는 학교 교육을 통하여 부유층이 더 많인 교육 기회를 얻고, 더 오랫동안 학교에 머물며, 그로 인하여 더 많은 교육재정 지원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이는 역진적 세금 부과를 부른다. 빈곤층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으므로 교육재정 투자를 덜 받음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같은 보편적인 제도에 대한 세금은 부유층과 동일하게 내기 때문이다. 역진세에 따라 운영되는 학교에서 학습자에게 전수되는 지식은 그 자체로 일방적이고 타율적일 뿐만 아니라, 평가와 선발의 경험을 누적하며 교육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학습자 본위의 흥미, 활동은 교육과정에서 벗어난 것으로 확인될 경우 가차없이 배제된다. 종국에는 이러한 제도적 포섭과 규격화의 통과의례를 거친 이들만이 학습받은 자로 간주되어 산업노동(labor;일리히는 자율적 노동work와 산업노동labor을 구분하여, 전자에 인간의 근원적 활동이라는 가치를 부여했다) 기회를 부여받는다. 다시 말하자면 학교는 산업사회 노동자를 생산하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동시에 산업사회의 생활양식까지도 “교육”을 통하여 주입하는, 탈인간화적 기계장치라고 그는 보았다. 자본주의와 제도권력에 따라 전통적 사회공동체가 파괴되고 인간이 파편화된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교사라면, 교육자라면,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평생에 걸친 성찰과 모색은 필요하지 않을까? 혹은, 교육자로서가 아니라 교육노동자로서 자신들이 산출된 경과에 대해서만이라도 성찰은 필요하지 않을까?


일리히의 사상은 그러나 말 그대로 사회로부터 학교제도를 몰아냄으로써 전통적인 인간사회와 그 작동원리를 복원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이상론에 가깝다. 학교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해방교육론의 동지인 프레이리와의 우정은 유지하면서도 교육적 협력은 중단되었고, 교육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중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추세다. 그러나 지금 일리히의 교육론에 대한 검토가 요구되는 것은, 판데믹과 메타버스로 인하여 실제로 Deschooled society가 반교육적인 형태로 진전되는 징후들이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제도화가 교육의 본래 가치를 훼손한다는 그의 관점에 따라, 온라인 교육과정이 현실로 이끌어낸 교육 문제들과 그를 통하여 관측되는 가치의 전복에 대한 재검토가 강력히 요구된다.


온라인 수업은 교사와 교실, 판서, 시간표, 또래압력 등 학교의 통제력으로부터 학생들을 해방시킴으로써 학습의 주체가 학생들임을 새삼 일깨웠다. 교사가 아무리 열성적으로 온라인 수업을 설계하고 실시간, 쌍방향으로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여도 화면 바깥에 있는 학습자 자신의 자율적인 배움의 필요, 욕구, 동기가 없이는 배움이 발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그대로 방치하고 평가는 이루어진다. 그렇게 진행된 “수업”으로 학력인정이 발급되었고, 진급, 진학, 산업노동 자격을 얻는다. 배움이 없는 평가, 과정이 없는 결과. 교실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생소한 것처럼 재인식된 교육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깊이 성찰을 하였던가.


학생과 교사들이 그리워하는 교실수업, 전통적 학교교육이 온라인 수업과 다른가? 한 해 십 여 가지의 교과목을 실제 발달상황과 관계 없이 연령별로 강제받으며 학습자는 얼마나 큰 소외를 매 순간 경험했던 것인가. 교육의 본원적 가치가 제도에 의하여 전복되고 인간의 본질적 지적작용, 신체적 활동이 국가 및 자본권력에 의하여 포섭되는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성찰하였는가. 이러한 문제점들이 어째서 판데믹 이전까지는 정당화되었던가. 가치를 전복한 제도가 권력화되고 그를 통해 또다른 자본주의적 욕망을 잉태하는 것에 대해, 사회성원을 선별하는 매개체인 학교는, 지금까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인간의 자율성과 공동체성을 복원하기 위하여 사회를 deschooling하자는 일리히의 목소리는 그러나, 현실에서의 영향력을 차츰 소실하였고 <학교 없는 사회>가 출간된지 딱 50년이 지난 2021년 현재, deschooled society가 가치의 복원은커녕 제도적 정당화의 급진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예고되고 있다. 온라인 교육과정의 전면 도입이 학교 교육을 잠시도 멈출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고, 불가피하게 교육 가치가 훼손되더라도 학생들을 교육하고 진급시키는 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정말 믿는가? 온라인 교육과정이 보호한 학교교육 제도, 온라인 교육과정이 포기한 교육의 가치를 각각 살피고 온라인 교육과정이 2차로 정당화한 교육 가치의 전복 현상을 다시 성찰하여본다면 우리는 일리히의 세기보다 더욱 타자화되고 파편화된 학교와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감지능력을 학교교육은 우리 자신에게서 박탈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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