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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Oct 18. 2021

아기는 계절을 머금고 자란다

동백, 입주

"아 날씨 겨울이야ㅠㅠ"

"어 엄청 추워"

"나 반팔원피스가 전부라서ㅠㅋㅋㅋㅋㅋㅋ 스벅 간다고 하니까 원장님이 겨울이라고 비싼 본인 패딩 빌려줌ㅜㅜㅋㅋ"


 태어나는 날까지 아이는 아홉달 반을 자란다. 봄에서부터 겨울, 여름부터 봄. 세번의 계절을 머금은 채로 첫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하여, 겨울에 생겨난 동백이는 바야흐로 가을의 입구에서 첫 울음을 터트리고 이제 엄마 아빠와 사는 집으로 들어오는 날엔, 하늘은 바야흐로 청명하니 높고 길에는 어느덧 울긋불긋 물든 잎사귀가 떨어지고, 봄의 전령인 벚꽃나무의 이파리들이 빠알갛게 다시 가로를 수놓는 바로 그 시기다. 그런 날 바깥양반은 조리원 방을 일찌감치 비운 뒤, 학교에서 조퇴를 하거 올 남편을 기다리느라 잠깐 밖에서 나왔다가 그만 가을의 찬바람에 휙 녹아들어버렸다.


 바쁘게 두시간을 보내고 차를 몰고 조리원으로 향하는 나는 기분이 싱숭생숭. 특히나 날씨 이야기를 바깥양반에게 듣고 보니 더욱 그랬다. 동백이를 가지던 때는 겨울로, 제주도의 바람은 들쭉 날쭉 어떤 날은 파도가 사람 키만하여 우리의 여행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었다. 가파도와 마라도를 찾기로 한 날은 배가 취소되기도. 그런 추운 계절 피는 것이 동백꽃이고, 그리하여 겨울의 마젠타빛 꽃잎은 곱디 고와라. 동백이가 머금은 계절의 첫 잎사귀는 이토록 붉디 붉었으리라.

  바깥양반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것은 5월무렵이다. 바깥양반과 개학 전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오던 날, 하루 종일 몸살을 앓는듯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해서 내가 성화를 부리며 더 미루지 말고 당장 임신테스트기를 하라고 해, 새벽 1시에 내가 동백가 생긴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때가 이미 7주를 넘겼으니, 당장 심장의 고동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동백이의 첫 심장박동 소리를 바깥양반과 함께 듣지 못했다. 여기엔 긴 사연이 있으므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렇게 시작된 아기와의 만남은 그 뒤로도 꽤나 살얼음판이었다는 이야기로 밖에 설명은 되지 않는다. 바깥양반은 참으로 겁이 많아 12주 안정기까지 오로지 눕방만을 찍었다. 입덧이 심해서 또 눕방만 찍었다. 12주 안정기가 되니 무슨 무슨 태아 검사 결과를 받아볼 때까진 절대로 안심을 할 수 없단다. 또 다시 눕방만을 찍었다. 그리고도 무슨 무슨 최종 검사 때까지 또 다시 눕방만을 찍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백이가 봄을 만난 것은 5월의 봄, 영월. 


 최근 <구해줘 숙소>에 방영되기도 한 이후북스테이가 임신 뒤 우리의 첫 봄나들이였다. 겨우 겨우 입덧이 잦아들어 외출할 기운이 생긴 참이기도 하다. 차츰 배가 불러오는 몸으로 오랜만에 두시간 넘게 차를 타고 바깥양반은 동강 상류의 계곡 틈새 작은 언덕배기 위 숲속의 집으로 향했다. 봄. 봄을 맞기엔 참으로 좋은 날이로구나. 우리는 햇수로 10년만에 처음으로 함께 노래방 기계 앞에 섰는데, 뱃속의 동백이는 혹여나 아빠가 롤린을 부르는 것을 듣진 않았을지. 그때 무슨 그림을 머릿속에 그렸을지 알 수 없다. 어찌했든, 그날의 기억이 여름에 우리가 다시 영월을 찾게 된 이유가 되었고, 막 산자락을 조밀하게 메워나가는 초록의 잎사귀들로 바깥양반의 배는 건강하게 부풀어갔다. 

 임신한 부부가 가장 기대하는 이벤트가 입체초음파 검사다. 우리는 몹시도 덥던 여름, 여름휴가의 첫날에 입체초음파 날짜가 잡혔다. 그 전전날인 목요일에 아이 얼굴이 잘 잡히지 않아 주말 아침으로 입체초음파 선생님이 다시 출근해서 날짜를 잡아주셨는데, 수줍어서인지 아니면 엄마의 품에 너무 정을 붙이고 있는 것인지, 동백이는 얼굴을 푹 파묻고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초코우유를 먹고 아이를 깨우기 위해 병원의 계단을 올랐다. 이때 이미 바깥양반은 계단을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부풀어 있었고, 여름날 아침의 건물 속 비상계단은 몇분 걷지도 않았는데도 몸을 땀으로 적셨다. 다시 그렇게, 동백이의 얼굴을 초음파로 잡아보았지만 이번에도 실패. 얼마나 곱게 태어나려고 이리 얼굴을 꼭꼭 감추는지. 우리는 아쉬움을 품고 휴가 길에 올랐다.


 여름. 여름이란 건 그렇게 만만치 않은 계절. 제주도까지 용감하게 차를 달렸다. 하루 다섯시간의 운전,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의 이동을 뱃속의 아이는 견뎌냈다. 나쁜 부모라고 해야할 것 같지만은, 우리의 행복이 또한 아이의 행복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여름을 제주도에서 맞았다. 동백이에게도, 제주도의 파도소리와 바닷바람, 그리고 여름의 햇살을 전달해줬다고 해야 할까. 꽃이 만발하던 동백 군락지는 쌔까만 초록빛 동백꽃 잎사귀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노을과, 우윳빛 구름이 우리가 담아온 계절의 빛깔들. 다행히도 동백이는 건강하다. 얼마나 건강한가하면, 하루에 오줌을 열네번 대변은 세번, 그리고 꼬박꼬박 60ml씩 밥을 먹고 있다고. 아기는 튼튼한 게 첫째인데 건강한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

 그리고 오늘, 계절은 겨울, 그리고 봄, 또 여름을 지나 완연한 가을이다. 이른 가을날 태어나 엄마도 아빠도 가벼운 옷만을 입고 병원으로 향했다가, 약 3주가 지난 오늘의 빛은 흐린 가을 하늘 아래의 단풍, 느슨한 책새들이다. 아이의 얼굴빛은 단풍잎 같이 붉고 생생하다. 계절을 건너고 건너고 또 건너, 마침내 세 가족이 된 우리의 작은 집에 동백이는 닿은 것이다. 


 아직 아이가 넘길 계절은 길고도 길다. 그리고 오늘 처음 아이를 집에서 돌보는 나의 몇시간은 몇번의 계절을 넘겨온...것 같다고 하면 좀 과장이고. 한여름의 더위와 한겨울의 추위를 동시에 맛보는 정도는 된다. 육아에 봄날은 아이의 웃음이요 화창한 가을날은 아이가 자는 시간이다. 나머지 대개의 시간이 폭염과 혹한이다. 이제 그것을 또 맛을 보아야 하겠지만은. 그러나,


 그러나 계절은 가을이요, 또 다시 봄은, 여름은, 겨울은 가을과 함께 돌아올 것이지만은, 이 날 오늘은 돌아오는 것은 아니러니. 그러하니, 계절이 바뀌어 맞이한 오늘. 네번의 계절을 보내고 이른 오늘에, 나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각각 아이의 존재 하나 안에 오롯하게 감지한다. 아이는, 계절을 머금고 우리에게 온 선물, 혹은 그 이상의, 말할 나위 없는 어떤 고귀한 것. 


 이러나 저러나 어떤 계절이든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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