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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Oct 12. 2021

남겨진 아빠의 밥상

미션 : 냉장고 비우기

 잡채밥을 만들려다가 냉장고 한켠에 소세지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유통기한이 퍽 지난 제품. 언제 또 왜 샀더라? 뭔가 바깥양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줄 때 산 모양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옛글을 찾아보면 나올법도 하다만, 그럴 겨를은 없고. 일단 꺼내서 상태를 확인한다. 그리고 탕탕 두줄을 썰어서, 팬에 뒤늦게 올린다.


나 미션을 정했어.”

웅?”

냉장고 비우기.”


 지금의 내 상황은 이렇다. 코로나로 인해 조리원에 들어가지 못한다. 2주간 바깥양반과 동백이와 생이별을 한 상태. 조리원이 “면회”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따로 두지 않고, 원래 손님들이 오가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엄마와 아기만 입실해서 코로나로부터 완전 격리되어 있는 상태의 나는 면회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집에서 혼자 2주를 보내야하는 것이다.


그럼 좋겠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혼 뒤에 바깥양반이 3주라는 장기간의 연수를 떠나거나 친구와 해외여행도 한두번 다녀온 일이 있어서 새삼스럽진 않다. 그리고 대학원생 처지에 놀 여력도 없다. 공부할 거리가 산더미라, 노는 만큼 뒤쳐지게 되어있다. 시간을 아껴서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일이 고민이지, 2주나 시간을 어찌 보낼까 고민할 처지는 아닌 판이다.


 그러니, 내가 시간을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방법이란, 집을 치우고, 수리할 곳을 수리하고, 아이가 조리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인생을 시작할 우리 집 환경을 조성하는 것. 그 중에 하나가 냉장고 비우기다.


 요리를 좋아해서 내가 사서 쟁여둔 식재료들이나, 취미삼아 열무김치를 만들어 보내곤 하는 엄마의 김치통들이나, 바깥양반 드실 크로플 용 와플생지나, 하여. 우리집 냉장고, 특히 냉동실이 두명 살던 살림에 비해 그득그득한 상태다. 넣어두고 까먹은 것들도 있고, 돈을 아끼기 위해 대용량으로 사 넣은 것도 있다. 그러니, 이 냉장고와 냉동고 속 음식들을 어떻게든 줄여놓아야, 동백이가 집에 왔을 때 쾌적한 이유식 소분 관리 등이 될 터이다.


 하여 나는 2주간 냉장고와 냉동고에 남은 음식 비우기 미션을 바깥양반에게 통지하고, 지금 열심히 혼밥을 해먹고 있다. 굳이 약속을 만들어 놀러다니기보단, 꼭 만날 사람만 따로 만나고 있는데 그로 인해 후배 한명과 선배 두분. 그리고 나 때문에 모임이 미뤄졌던 절친 모임 두 그룹. 이번에 모임을 하고 나면 한 1년은 족히 만나지 못할 테니.


그래 냉장고를 비우는데 내가 막 요령이 있지도 않다. 열무국수 한통을 비웠다. 그런데 국물을 버리지 못한다. 맛있잖아. 이거 버리지 말고 뒀다가 국수 말아먹고 싶잖아. 그래서 기껏 김치를 다 비우고, 통은 그대로 냉장고로 돌아가는 식. 반면 소세지나 잡채처럼 단순히 잊어버려서 처리가 늦은 음식들은 후다닥 차려서 간단히 먹어버린다. 혼밥이라 허술하기 쉬운데 난 잘 챙겨먹어 좋고, 일거양득.


 살림을 한다고 음식 마구 버리지 못하는 나도 나지만, 또 어딜 방문하거나 하면 빵이나 과자라도 꼭 골아오고 싶어하는 바깥양반도 문제. 지난번에 벌초할 때 바깥양반을 위해 사온 튀김소보로도 뒤늦게 먹어치운다. 팥소는 살짝 맛이 간 것 같지만 먹고 아플 정돈 아니다. 음식 함부로 버리면 벌 받는 법이다. 내 아이는 나처럼 기르진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혼밥 한끼 한끼가 아이를 맞는 과정. 바깥양반이 동백이와 먹는 한끼 한끼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고 하니, 과연 음식이 보약이고 밥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정답이다 싶다. 바깥양반은 모유수유를 위해 그 좋아하는 떡볶이를 출산 직전에 잡순 뒤로 고춧가루를 끊고 건강식만 드시는 상태에, 동백이는 끼니마다 60ml를 딱딱 비우고 트름도 배변도 시원스럽게 잘 한다고 한다. 부모가 태교를 하며 잘 먹었으니, 아이도 잘 먹긴 한다. 다행한 일이야. 나의 밥, 바깥양반의 밥, 동백이의 밥. 그리고 언젠간 맞이할, 우리 모두의 밥.


 그러하니, 부지런히 먹고, 치우고, 그래서 새 음식, 신선한 재료들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지. 우리의 집에 동백이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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