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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21. 2022

생애 최고의 커피 경험, 군산 카페리즈

서울에 엘카페딸이 본점이라고.

"오우...여기도 뭐야 올드하네. 좀 너무 오버하는 인테리어 아냐?"

"웃기네! 커피 맛있는 데라서 오빠 데리고 와준 거거든?"

"아우 야. 농담이다."


 차에서 내리며 나는 아내에게 농담을 던졌다. 군산에 온 두번째 날의 두번째 카페. 그런데 은파호수 주변이 막 번화한 동네는 아니다보니 이런 화려한 외장에서 뭐랄까 2000년대의 향수를 느낀 탓이다. 첫 인상은 어설픈 대형카페 느낌이랄까. 그때까지는, 나는 저 벽돌로 만들어진 문양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2층으로 난 계단을 오르며 구식이라는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2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낡은 공간이긴 한데 대번에 다섯대의 로스터가 눈길을 잡아끈다.


"어서오세요!"


 동시에 활기찬 목소리의 바리스타님이 우릴 맞으시면서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랴, 콩을 볶으랴 잰 걸음으로 가게를 누비고 있었다. 나는 홀리듯 아이를 자리에 눕힌 다음, 드립으로 과테말라 게이샤 원두를 고르고 나서 로스팅 머신을 구경하기 위해 그 앞에 섰다.


"머신 만져보셔도 돼요."

"아 네네."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콩의 배전도를 유심히 보는 등, 로스팅 머신을 오래 구경하자 바리스타님이 또 와서 원두를 하나 빼내, 체프를 털어내더니 묻는다.


"로스팅 해보셨어요?"

"아 저 집에서 라면냄비로 볶거든요."

"네에 라면냄비로요?"

"아 라면냄비는 좀 과장이고 유리뚜껑 있는 냄비에...그거 보니까 잘 하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네 팬 로스팅. 그게 괜찮아요? 겉만 타지 않나요?"

"아니 뭐...요령도 생기도 해서 지금은 약불로 오래 볶고 해요 그리고 원두가 중요하니까."

"아 네 그렇죠. 그럼 저기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바리스타님이 바쁘시다. 테이블이 15개는 될법한 제법 큰 공간인데 2월의 평일 오후, 혼자 지키는 시간인지 혼자서 로스팅에, 커피를 내리는 일에 바쁘다. 또 카운터로 달려가서 손님의 주문을 받으며 손끝으로 가리킨 자리엔 드립 바가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로스팅 머신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뭔가 분위기가 묘한 곳이다. 과테말라 게이샤 원두가 9,000원. 그리고 파나마 (아마도 에스메랄다겠지) 게이샤도 9,000원. 그런데 드립바도 갖추어져 있는데, 관을 연결한 설비가 이 공간의 대강대강한듯한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으니 잠시 뒤에 바리스타님이 오시더니, 뒤에 있는 작은 그라인더에서 콩을 넉넉히 내린다.


"지금 마침 볶은지 30분쯤? 된 게이샤네요."

"네에? 숙성 없이 바로요?"

"네 저희는 그렇게, 그리고 드립을 할 때도 조금 다르게 해요."


 잠깐 바리스타님의 눈이 하늘을 향한다. 뭔가 생각하는듯. 그리고서 데워진 드리퍼를 서버에 놓고 방금 갈아진 원두를 담더니 상당히 터프하게 첫 물을 부었다.


"자 시향해 보세요."

"네."

 정직히, 향으로 커피의 질을 잘 구분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말끔하게 볶아진 고소한 냄새가 은은히 올라온다. 그 사이 또 바리스타님은 원두가 불려지는 동안 다른 주문을 받고, 커피를 샥샥 내리는 등 순발력을 발휘했는데, 자리를 비워주신 덕에 내가 커피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점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향 괜찮으세요?"

"네네."

"보통은 이제 붓는식인데, 저희는 이렇게 물이 위로 차오르게 해서 최대한 적게 해서 원액을 추출해요."

"오..."


 바리스타님이 드립포트의 주둥이 끝을 원두에 찌르며 드립퍼를 반바퀴 돌린다. 그리고 짧은 시간 텀을 두더니, 다시 원두에 점점이 찌르며 반바퀴 돌린다.

"어 진짜 특이하네요."

"네 저도 여기서 처음 배웠웠는데, 우리가 추구하는 맛은 이런거더라구요."

"아...그래서 원두도 그렇게 많이 올리신 건가요?"

"아 이건 일부러 좀 더 많이 넣었어요."

"아하."


 로스팅에 대해서 아는 척을 했더니 원두를 조금 더 넣어주신듯, 나는 감사히 여기며 이쯤에서 아내를 불렀다.


"여보 애기는?"

"지금 놀아."

"지금 와봐 잠깐만."

"왜?"


 아내가 왔고 옆에 앉았고, 나는 이 신기한 광경을 함께 구경시켰다. 그 사이 고개를 빼 아기가 누워있는 것을 보니 혼자서 그럭저럭 조용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두번 정도 더, 원두에 드립포트 주둥이를 찔러서 원두를 적시는 식으로 추출을 하시더니 서버를 흔들고, 바리스타님은 잔들을 준비한다.


"이렇게 여기서 가스를 빼고요, 커피는 어떻게 드세요?"

"아메리카노죠."

"네 한번 드셔보세요."

 잠시 뒤 바에는 세개의 잔이 나란히 깔린다. 에스프레소 분량의 드립원액, 더운 물을 희석한 보편적 형식의 드립커피, 그리고 얼음에 부어진 원액. 나는 순서대로, 먼저 원액, 핫, 아이스를 차례로 맛봤다. 그 맛은 산미, 아로마, 그 밖의 여러가지 맛이 통제된 깔끔하고 순수한, 커피의 풍성한 맛 그 자체.


"오...뭔가 신기..."

"괜찮으세요?"

"아...뭔가 관점이 바뀌는듯한. 너도 먹어봐."

"윽. 써."


 아내에게 드립 원액을 권했다. 아내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쓰다고 한다. 놀라운 방식이다. 드립으로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고소한 커피를 추출하다니. 게이샤에서 기대했던 그런 맛이 아니었다. 풍성한 산미와 아로마가 살아있는 그런 커피가 아니라, 진하고 진한 커피 본연의 맛. 에스프레소니까 당연히 너티함이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겠지. 핫커피에서도 풍성한 커피향이 우러나오며 부드럽게 향미가 그것을 감싸돌았고, 아이스에선 에스프레소의 산미가 부각되었다.


"아 신기하네요 저는, 뭔가 컴플렉스한 맛을 그동안 계속 만들려고, 한 2년동안 찾고 찾았는데...이건 완전 방향성이 달라서."

"네 지금 원액 추출한 거에 다시 드립해서 드려볼까요? 그게 아마 생각하시는 맛일 수도 있어요."

"네네."


 바리스타님이 또 달려오더니, 먼저 내려진 드립퍼에 그대로 물을 부어, 평범한 스타일의 드립커피를 내었다.


"이렇게 드시는 걸 좋아하시는 분도 분명히 있어요."


란는, 신중한 첨언까지.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이미 원두를 로스팅하고 추출, 서빙하는 모든 과정에서 너무나 선명히 느껴진다. 카페리즈가 추구하는 방식, 에스프레소에 가까우리만치 순수한 커피의 맛. 그리고 2차로 내린 그 커피에선, 우리가 알던 좀 더 일반적인 드립커피가 느껴진다. 다만, 게이샤답게 다른 싱글오리진보단 훨씬 다층다양한 맛이 뿜어져나왔다.


"이쪽이 그렇긴 하네요. 원래 기대하는 게이샤의 좀 컴플렉스한 맛이고."

"하하 그렇죠."

"아 근데 놀랍다 정말."


  내가 플로럴한 아로마와 캐릭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원두를 고르고, 로스팅을 하는 것은 호주에서 사온 원두커피의 경험에서다. 라떼를 주로 먹는 그들이 우유에 감춰지지 않게 살려낸 그 풍성한 꽃향기. 그래서 2년 사이에 제법 성과가 있어서,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몸에 꽃향기가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 드는 훌륭한 콩을 찾아내, 작년엔 그 콩을 사는데 돈을 제법 썼다. 그런데, 오늘은 정 반대로 오로지 커피의 그 향, 고소하고 진한 풍미에 흠뻑 빠지다니.


 9천원에 이렇게 훌륭한 커피를 네잔이나 마셨다. 군산에 온 보람이 있는 호사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바리스타님은, 사실은 서울에 본점이 있다며 책을 보여준다. 신사동의 엘카페딸이 본점. 이곳은, 분점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알고보니 엘카페딸과 카페리즈의 사장님은 업계에 평판이 자자한 유명인 아닌가. 똑같이 로스팅까지 할 수 있다. 이야!

"저거 아까 봤는데, 생두들을 저 가격에 여기서 볶아서 가는 거죠?"

"네 맞아요."

"아 그럼 생두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네요."


 로스팅머신들 옆 선반에는 다양한 생두가 구비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에 들어와선 이걸 보고 좀 의아해했다. 생두를 왜 이렇게 팔지? 그리고 왜 이리 비싸? 그런데 알고보니, 이 생두를 골라 그대로 로스팅한 뒤 포장해서 가져가는 형식이었고, 그렇게 따지면 전혀 비싼 가격이 아니다. 200g에 2만원 이내 가격. 강릉의 뉴욕커피상점에서 산 원두가 500g에 2만원 내외였으니 비교가 되긴 하지만 그것은 뉴욕커피상점 쪽이 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에 파는 것이고, 카페리즈의 경우 일반적인 원두의 균일가라고 할 수 있다. 취향에 따라 그것을 셀프로스팅으로 배전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까지.

 나는 취향의 원두를 하나 골라서 바리스타님에게 내밀었고, 로스팅을 시작하고 7분만에 첫 퍼핑이 시작되었다. 바리스타님이 오며가며 봐주더니, 1차 퍼핑이 끝날 무렵 이제 빼도 되겠다고 한다. 나도 동의. 차르르 하고 원두가 쏟아져내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체프를 털어내고, 종이봉지를 받아 포장까지. 그러면서 내 마음속엔, 엘카페딸에서 이렇게 로스팅을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가득찼다.


"저희 로스팅하면 한잔 공짜로 드리거든요. 에스프레소로 드릴까요 드립으로 드릴까요?"

"아하...그럼 에스프레소로 주세요."

"설탕은?"

"원래 안먹는데, 보니까 선반에 설탕도 많이 판다는 건."

"네에 설탕 넣어서 드셔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그게 풍미를 살리는 때도 있거든요."

"네에 네에 압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여전히 조심스러운 첨언을 나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바리스타님이 젊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익히 알만하다. 카페리즈와 엘카페딸 같이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커피의 바리스타라면 그 지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손님들에게 또 얼마나 시달릴지. 세상엔 그저 자신의 취향만이 정답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또 많으며, 그런 사람들이 남이 내려서 주는 커피에 이런저런 불필요한 말은 왜 그리 많을까.


 나는 종이봉투에 콩을 꾹꾹 눌러담았다. 집에 올라가서 따로 볶으려고 일부러 조금 콩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이 잘한 일이었다. 저 통의 원두를 다 부었다면 종이봉투를 두개 썼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아기가 있는 우리 테이블로 돌아오니, 바리스타님이 에스프레소를 가져다주었다. 먼저 마신 드립 원액과 비교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이게 카페리즈니까, 엘리자베스란 건데. 누굴까 엘리자베스는."

" 여자인가본데? 얼른 마셔 우리 여기 오래있었어 계획보다."

"아니, 이런 좋은데를 와서 어떻게 내가 빨리 일어나."


 아내는 잔에 그려진, 그리고 건물 외벽에도 그려져있는 일러스트를 가리키며 날 재촉한다. 밖에는 이틀간 호남 일대를 뒤덮은 폭설이 거센 바람과 함께 이어지고 있다. 눈 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나는 9천원에 커피 네잔을, 그리고 바리스타님이 커피를 못 먹는 아내를 위해 맛을 보라며 조금 내어준 워시드 원두까지, 그리고 또, 로스팅을 하고 받은 에스프레소까지, 이렇게 커피도락을 즐겼다. 이 어찌 또 있을 호사일까.


 나는 친한 직장 동료들끼리 만든 커피취미 톡방에 신나서 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고 휘휘 저어 두 모금에 모두 마셔버렸다. 닷새가 지나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엔 내내 그 진한 드립커피의 원액의 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생애 최고의 커피 경험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내게 찾아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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