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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밥과의 전쟁, 아란치니와 함께 끝.

육아 문센 그것은 새로운 라이프의 시작

by 공존

올해 초 개학과 함께 나는 찬밥과의 전쟁을 조용히 치르고 있었다. 3월 어느날, 바깥양반이 마침내는 "찬밥은 싫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사정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내가 밥을 하고, 보통은 아침밥도 어지간하면 거하게 먹고, 나는 출근을 한다. 그럼 바깥양반은 집에서 혼자서 아이를 보며 점심을, 그리고 이따금 저녁까지를 해결한다. 그게 작년까진 어찌어찌 넘어가졌다. 워낙 아이 땜에 정신이 없어서 밥이 넘어만 가면 되는 판이었기 때문에 내가 뭘 차리고 간들 그걸 꺼내먹을 틈새도 없었기 때문. 그러나 올해가 되니 바깥양반이 조금 식생활의 질을 따질 여력이 생겼고, 또 휴직 기간이 길어지니 밥의 질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밥 관리를 대충해서 하루 이틀 밥을 묵히면, 바로 피드백이 날아온다. 새밥이 아니면 싫어! 라며. 그래서 나는 최대한 끼니마다 밥을 차려주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그게 또 쉽지 않다. 매일 밥을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거니와 원래의 내 입맛의 지평에서 새밥 찬밥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좀 하루 이틀 묵으면 어떠하리. 묵으면 볶아서도 먹고 비벼서도 먹는 게 밥이다. 실제로 결혼하고 4년간, 바깥양반은 그런 내가 차려주는 밥에 아무 불만없이 잘만 숟가락을 들었다. 다만 그게 난생처음 휴직이란 걸 하고 아이와 하루 종일 보내는 시간이 쌓이고 쌓이니, 이제 밥에 대해서만이라도 우울감을 느끼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이해되는바라, 그로 인하여 찬밥은 쌓였다. 내 딴엔 점심, 저녁도 챙겨먹으라고 아침이나 혹은 점심시간에 맞추어 예약기능으로 밥을 해두면, 바깥양반이 그걸 남겨놓거나 한다. 그럼 냉동실로 슝. 또 내가 단순히 양조절을 못하거나, 변심에 따라 밥이 남아서 그걸 얼리는 일도 슝. 그렇게 3월부터 몇달을 보내니 냉동실 한 칸이 고스란히 밥으로 가득이다. 어쩌다, 볶음밥을 할라치면 바깥양반은 바로 알아차린다. 새밥 아니고 헌밥으로 한 볶음밥이냐면서. 하기사, 신경을 안쓰면 모를까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새밥과 헌밥만큼 구별하기 쉽고, 사람 김 빼는 게 없다. 헌밥이라니. 이 얼마나 사람 서운하게 만드는 일이란 말이더냐.


여기에 문화센터가 조금 영향을 미쳤다. 드디어 아이가 허리를 버티고 앉을 시기가 되어 문화센터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 웬만하면 바깥양반은 기분전환도 할 겸 점심을 문화센터가 있는 대형마트에서 먹고 온다. 그렇다면? 밥이 더 남는다. 헌밥과 냉동밥은, 늘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종 기회가 생기면 아란치니를 만든다. 냉동밥을 해결해야 하며, 그걸로써 바깥양반이 즐길 수 있는 최상의 미각에 해당하는 메뉴. 오늘은 조금 오랜만이다. 아란치니를 구색에 맞게 하려면 제법 손이 가는데, 사실 집에 빵가루조차 없었어서 얼마전에 돈까스를 만든다고, 아마 종강 뒤인 것 같은데, 빵가루를 사온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수박을 하고 나서 한바퀴 돌았는데, 그럭저럭 무난한 가격의 간 쇠고기가 발견되었다. 간 쇠고기로 뭘 할까. 라구도 만들고 아란치니도 만들자, 하고 나는 한 팩을 사온 것.


하여 라구도, 두시간이나 푹 삶아서 만들어둔 상태다. 마늘 볶고, 간 쇠고기 볶고, 거기에 허브솔트, 거기에 생토마토와 토마토소스에 페퍼론치노에 생후추에...또 뭐더라. 할튼 나름 신경을 써서 만들어놨다. 라구로는 패투치노 파스타를 한번 만들어먹었지. 라구 소스로 글을 쓴 적도 있어서 사진조차 찍지 않았다. 사실 아란치니 한끼도 글을 쓸 정도나 되는 일인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상을 차리고 보니 바깥양반이 또 기쁘게 드시어, 이건 올려도 되겠다 싶다.


일요일 아침의 아란치니. 밥을 해동시키는 동안 대파(양파가 없었다. 뭐 비슷한 풍미를 내니 괜찮겠지)와 당근, 간 쇠고기를 볶은 뒤, 거기에 생 토마토도 하나, 그리고 토마토에서 채수가 배어나올 때쯤 크림스프 분말을 세 스푼 정도 넣고 볶은 뒤 밥을 투입했다. 끈적끈적 부드러운 아란치니용 볶음밥.


음식을 할 때마다 느끼는 확고한 주관이지만 정규레시피를 따라서 최상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만, 갖고 있는 수단들을 대체로 여러가지 활용을 해서 가정의 빈약한 식재료나 향신료를 보완하는 것도 방법이다. 크림스프분말이 좋은 식재료는 절대 아닐 테지만, 그것을 보완할 방법도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태라서 어느정도는, 용인 가능한 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란치니를 뚝딱, 일요일 아침에 만들기 위한 또 다른 비정규 레시피는 크림스프에 이어서 치킨튀김가루. 한번 치킨을 만들어먹어보려다가 생각보다 훨씬 비효율적인 처사길래 그냥 적당히 가성비 좋은 치킨을 시켜먹기로 하고 치킨만들기는 단념한 상태라, 가루만 냉동실에 그대로 남아있다. 근데 이걸로 아란치니를 만드니, 의외로 괜챃다. 치킨의 풍미가 아란치니를 완전 뒤덮어버리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색무취하게 "튀김"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만도 아닌 나름의 개성이 있는 튀김옷이 되었으니, 썩 만족스러운 선택. 그리고 세번째 대책은 바로 라구소스였는데, 미리 정성들여 만들어놨으니 이거야 말로 만족스러운 보완책이지.

그럭저럭 잘 튀겨졌다. 이걸 다 튀겨내느라 새 기름을 또 반냄비 가까이 썼다. 튀김의 딜레마는 여전한 일이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에어프라이어로는 충당이 안되는, 풍성한 기름 안에서 튀겨져 나온 바삭한 튀김의 식감. 이렇게 하면 얼린 밥도 바깥양반을 기쁘게 할 한끼가 될 수 있다.


사실 최근 내가 나태해진 것도 있다. 뭐랄까, 정말 몸바쳐가며 한 학기를 보내고, 종강을 맞고 나니 김이 쉭 빠진 상태랄까. 종강 전까지는, 하지 못했던 게임도 하고 독서도 하고 글도 좀 쓰면서 시간을 보내니, 밤에 으레 늦게 자기 마련이고 그럴때...쌀을 씻어서 밥을 안치는 일도 도외시하게 된다. 풍선효과랄까. 내가 바라온 억눌려온 충동이 해방되니 원래의 규칙적인 일과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기분.

그래도, 그러나. 아란치니는 역시 맛나다. 느끼하진 않다. 페퍼론치노까지 손으루 부숴 넣은 맛깔진 라구소스가 매콤하게 딱 맛을 잡아준다. 밥을 크림스프 분말에 볶아놓고 그걸 튀겨서 라구소스에 버무려먹는 것은 뭔가 죄책감 넘치는 맛이긴 하다. 그러니까, 맛이 좋은데...맛이 좋지만 왠지 이렇게 해먹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아란치니 덕에 바깥양반도 모처럼 일요일 아침 기분좋은 한끼. 나는 얼린밥들을 해결했으니, 윈윈이다. 그리고 이제 곧 방학이다. 찬밥과의 전쟁 끝, 새밥과의 전쟁도 이제 곧 끝이 난다. 그리고 방학이 되기 전에 장고의 식재료들도 어서 하루 빨리 해결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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