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떡으로 만든 왕 떡볶이
"성심당 앞에 왕 떡볶이 먹으러 가자~."
"응!"
아직 물색 모르던 예닐곱살 시절, 사촌누나들이 성심당 앞 골목에서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며 나와 누나를 데리고 나갔다. 이제, 매운맛은 대강 적응했을 나이. 그러나 떡볶이라는 게 뭔지만 알았지 그 앞에 붙은 "왕"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던 어린 나는 길목 앞자리의 성심당이 아닌, 그 뒤 은행동 복잡한 골목까지 이끌려가서 포장마차 앞에 섰고, 맵디 매운 왕 떡볶이를 어찌어찌 어린 아이의 작은 입에 밀어넣었다. 가래떡으로 만들어진 큰 떡볶이를.
"누나 이게 왕떡볶이야?"
"응 맛있지?"
"매워."
당시, 꼬맹이였던 내가 알고 있는 떡볶이는 초등학교 앞, 태권도장과 문방구를 끼고 있는 건물 1층에서 한 접시 100원에 팔던 허어멸건 떡볶이 뿐, 당시 대전의 유일한 번화가였던 은행동 골목의 포장마차에서 파는 맵디 매운 성인지향형의, 그것도 가래떡으로 만든 왕떡볶이란 퍽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음식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대전에서 이 왕떡볶이는 제법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딜 가나 떡볶이는 왕떡볶이를 취급했다. 처음 이사를 가서 살게된 둔산동의 아파트 앞 마트 분식집에서도, 다시 돌아온 부사동의 우리 서점 앞, 새로 생긴 분식집에서도, 떡볶이는 왕떡볶이. 심지어 계산도 편했다. 어묵 하나에 100원, 떡 가래 하나에 100원. 그럼 천원으로 한끼가 아주 맛깔나게 해결되곤 했다. 물론, 그 천원을 가지고 나는 떡볶이를 사먹지 않고 오락실에 가곤 했지만.
오늘 왕떡볶이를 진심을 담아 만들게 된 거시적 배경은 이와 같다. 나의 어린 시절 한자락을 추억으로 물들인, 꽤나 핫하고 맵단짠한 그런 음식이랄까. 몇가지, 부수적인 거시 배경을 추가하자면 결혼하고 나서 떡볶이를 한달에 한번꼴은 했으려나. 그러니 벌써 수십번을 만드는 동안 자연스럽게 내 취향에 따라 떡볶이는 어묵을 배제한 깔끔한 맛, 그러나 라면 사리를 거의 항상 넣으므로 라면 스프를 활용한, 매콤한 라면의 맛에 가까웠다. 그러나 떡볶이는 어디까지나 간편식에 가까워서 나는 그저 있는 재료의 한도 내에서 뚝딱뚝딱 대충 만들어 대충 먹었을 뿐이다. 맛깔나게, 제대로 맛을 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미시적으로 오늘의 배경은 첫째, 냉동실에서 가래떡 한무더기가 숨 쉰 채로 발견되었다. 엄마가 어디서 쌀이 많이 생긴 것인지, 가래떡을 한 판을 해서 내게 넘긴 물건. 나는 그걸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두곤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한 한봉다리를 해동시켜두곤 뭘 할까 뭘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둘째, 지난주에 만들어둔 막국수 비빔장도 발견했다. 일주일간 숙성했으니 지금쯤 맛있겠지!? 하며, 떡볶이에 넣기로 했다. 셋째, 역시 냉동실에서, 엄마가 준 부산 유명 브랜드의 어묵이 발견되었다. 조카들이 어묵을 잘 먹는다. 그래서 누나가 정기적으로 대용량을 산다. 그것을 엄마도 받아서 갖고 있다가, 또 내게도 나눠주시는 것이다.
이쯤되면,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오늘 내가 정성 들인 떡볶이를 만들게 된 과정이 설명은 되었으려나.
아. 바깥양반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다.
하여, 오늘은 어찌 어찌 아이와 아침부터 놀아주다가 바깥양반의 배고파 소리와 함께 간신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주방일을 해야 육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것은 프로주부인 것인가. 우선...가래떡을 손가락 길이로 썰어서 막국수 비빔장과 함께 먼저 끓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래떡이라 굵어서, 이렇게 미리 맛을 들여놔야 떡이 싱겁지 않을 것이고...그리고, 이왕 제대로 만들기로 했으니 떡을 끓인 국물에서 우러난 그 특유의 진한 떡볶이 국물도 연출할 생각이다. 10분만에 완성하는 내 평소의 레시피에선 떡이 국물에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 편. 비주얼적으로도, 떡이 우러난 국물이 더 보기가 좋다.
그리고 대파, 그중에서도 파란 부분들을 넉넉히 썰어서 향미유에 볶아서 파기름을 낸다. 원래부터 내가 대파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특히 떡볶이에 들어간 대파, 잘 볶아져서 떡볶이에 담긴 그 녀석은 꽤나 맛있는 별미다. 비빔장에 무와 양파 등 정성이 팍팍 들어가 있으니 양배추나 당근도 필요 없다. 내가 좋아하는 대파를 넉넉히 넣는 것만으로도 색감과 맛은 보장된다.
그리고 대파가 충분히 볶아져서 숨도 죽고 마이야르 색감이 되자 거기에 바로 보리새우와 국물멸치를 물과 함께 한웅큼 집어넣어서 육수를 우린다. 떡볶이에 보리새우라니. 그리고 국물용 대멸치라니 이게 웬 생활의 달인인가 싶지만. 어묵만 들어가서는 해물육수로선 웬만하면 맛있기가 어렵다. 어묵의 달콤한 조미료향이 지나치게 강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즉, 보리새우와 국물멸치는 어묵이 내는 해물육수의 느낌을 바로잡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20분 가량 적당히 해물육수를 낸 뒤엔 가래떡과 끓여지고 있던 메인 국물을 볶음 냄비 쪽에 붓고, 어묵도 넉넉히 썰어 넣는다. 그리고 다시 끓인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맛있다. 이미 성공한 요리다.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귀찮은 보리새우와 멸치 건져내기 미션이 지루하지 않다. 다시백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어차피 육수를 내는 건 시간과의 싸움인지라, 한 5분 정도 투자해서 일일이 수저로 떠내면 될 일이다. 그 사이에도 국물은 맛이 들고, 대강 건져낸 건더기들을 숟가락으로 꾸욱 눌러줘서 육수를 마저 따라내면, 그럼 되지.
아 근데 글을 쓰며 생각을 하니 애초에 가래떡을 미리 끓일 때 거기에 넣었으면 더 좋았을까. 모르겠다 그럼 혹시나 가래떡에 달라붙어 떼어내는 게 귀찮아졌을지도. 아니, 애초에 가장 좋은 건 아침에 조금 일찍 침실을 나와서 해물육수를 미리 내두었어야겠지. 뭐 괜찮다 오늘 성공했으니 다음에 또 만들면.
완성되어 간다. 이제 또 한소끔, 마저 떡 없는 떡볶이 국물을 끓이면서, 미리 가래떡을 솥에서 꺼내 좀 말려둔다. 꾸덕하게 말라있던 가래떡이 아닌지라 냄비에서 미리 맛을 들여놓느라 끓이는 동안 떡이 굉장히 부드러워진 상태다. 이대론 쫀득쫀득한 떡볶이가 될 순 없으니 잠시라도 공기에 접촉시켜 물기를 빼내는 것이다. 두번째 성찰지점이군. 어쨌든 음식 하나 제대로 만들기가 이리 만만치가 않다. 떡볶이 하나라도 진심이 되면, 온갖 고려사항들이 늘어난다.
이제 가래떡을 붓고, 마지막으로...고추장 한 스푼에 챔기름. 그럼 정말 완성이다. 가래떡을 조금 잘라서 입에 물어보니, 야 맛있다. 막국수 비빔장 때 넣었던 알싸한 고춧가루의 매콤화끈한 맛도 드러나고, 갈아 넣은 무와 양파, 매널(마늘)의 미묘한 맛도 그대로 소스 안에 살아있다. 시럽과 고추장을 좀 넣은 것 말고는 조미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무 양파 매널 고춧가루 그리고 보리새우와 멸치까지 재료 하나하나의 풍성한 맛이 살아있는...이것이 진심의 힘인가? 진심은 통하나? 싶은 맛.
"다 됐어. 나와."
"응. 가자 동백아."
아내, 아니 바깥양반을 부르며 녹색, 분식집 너낌 나는 접시에 떡볶이를 담는다. 접시에 담아넣으며 보이 야 이게 떡볶이지, 하며 스스로 뿌듯. 가래떡은 원래 입으로 뚝 뚝 잘라먹어야 맛있지만, 아기를 안고 먹느라 앞접시 같은 걸 놓기 어렵다. 젓가락으로 하나 하나 잘라가며 먹는다. 나는 쌀떡을, 그리고 바깥양반은 밀떡을 조금씩 더 먹는다. 한 입 한 입마다 떡볶이 속에 담긴 각 양념 재료들의 정수를 느끼며 말이지.
음식이란 남겨지면, 버려지면 당연히 아까운 물건이다. 그러나 제대로 그것을 먹지 못하면 그 또한 아까운 일이다. 가래떡으로 할 수 있는 음식들이 많겠지만 떡볶이, 그중에서도 그냥 떡볶이가 아니라 정성 들인 떡볶이. 재료부터 조리법까지 평소보다 "진심"되게 만든 오늘의 떡볶이는, 정말로 이 음식을 조금도 낭비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부록 : 막국수 비빔장의 은밀한 비밀
https://brunch.co.kr/@coexistence/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