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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 저녁식사

더워 더워 더워 더워

by 공존

"여기서 뛰어가면 안돼?"

"...네가 선택한 거니까. 책임만 져. 내게 투정 부리지 말고."


토요일이 조금 선선하더라니, 일요일은 퍽 무더운 날씨였다. 오전에 두 건의 스케줄- 글쓰기 모임과, 동네 친구와 짧은 커피브레이크- 를 마치고 나서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집을 나섰다. 오전에 잠시 외출했을 땐 내가 동백이를 데리고 나와서 카페에서 두시간쯤 놀아준 덕분에 오랜만에 바깥양반이 주말 아침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려던 동네카페의 초입에, 말도 안되게 길이 막히고 있었다. 등산로에 접한 카페인지라, 일요일, 어제처럼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사람들이 우다다다 달려가서 숲과 산과 하늘을 즐길만은 했다. 게다가 그 카페가, 요 3,4주간 장마 때문에 오픈일이 들죽날죽하여, 우리 바깥양반 같이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제같이 화창한 날 마침내 방문일정을 많이들 잡은 모양.


허나 나즈막한 언덕배기 500여 미터를 앞두고는 길이 너무나 막혀, 나는 은근히 바깥양반에게 차를 돌릴 것을 종용했다. 아무리 날이 좋고 카페가 날씨보다 더 좋더라도, 이것을 보라 이다지 길이 막히는데 카페에 자리가 있겠는가 하며.


그러나 바깥양반은 나의 상상 이상으로 강한 여성이었고, 10kg인 아기를 아기띠도 없이 끌어안고 언덕길을 올라온 것이다. 인간 승리. 그러나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내가 주차를 어렵사리 하고 5분 쯤 늦게 올라갔을 때, 바깥양반의 얼굴은 익어있었고 아이의 이마에도 땀이 가득했다. 이 날씨에, 아이를 안고 여기까지 왔으니 덥지 않고 배길 소냐.


바깥양반은 그럼에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자신이 하고자하는 바를 위해, 굳이 내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카페 하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모습. 이건 놀리는 것이 아니라 리스펙이다.


"저녁은...비빔막국수 먹자."

"응 일단 가서 수박부터 먹자. 냉동실에 살짝 올려서. 씻는동안만. 바로 먹게."


그러므로, 나도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저녁은 비빔막국수로 정했다. 오늘 같이 더운 날, 땀까지 흘린 뒤엔, 상큼한 비빔막국수 한사발이 제격일 것 같아서였다.


자 집에 와서 분리수거를 잠깐 하고 들어와, 나는 샤워를 하고 나서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바깥양반이 아이를 맡는 동안, 먼저 폰으로 막국수 비빔장 레시피를 조금 찾아봤다. 무...배...야채가 제법 들어가는구나. 그렇다면 일단 혼합과채쥬스 하나.

원래 양념장을 집에서 만들 일은 잘 없다. 양념장 씩이나 해먹어가며 만들 일이 없는 것이다. 매운탕을 끓인다거나, 생선을 조릴 때도 양념장을 만들지 않고 대강 레시피 보고 여러 양념을 넣는 식이지.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비빔막국수 비주얼을 원했다. 그러려면 고명까지 맞춰줘야지. 이리가나 저리가나 어쨌든 막국수 비빔장은 필수.


한편으론 물막국수가 아닌 비빔막국수가 된 사연도 자리한다. 막국수를 해먹기로 결정을 했을 때, 고기육수를 내어 동치미 국물과 합치긴 해야하고, 집에 온 것이 대강 네시반쯤이었으니 저녁 식사로 막국수를, 시원하게 만들어먹긴 애초에 무리인 시간이었다. 그러니까...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굳이 물막국수를 만들 일이 아니라, 비빔막국수를 해먹으면 되는 일이다. 바깥양반이 물보단 비빔파에 살짝 기울어 있는 면도 있고.


그리하여 대강 집에서 뚝...아니아니. 최선을 다해 저녁식사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굳이 배나 과일을 찾을 필요 없이, 아이 먹인다고 사두었다가 당도가 높아서 우리가 먹기로 한 이런 혼합과채쥬스 하나가 꽤나 적합하다.

그런 다음 양파와 마늘. 대강 이정도면 되려나. 그런 다음 무. 대강 이정도면 되나. 눈대중으로 대애~충 양을 잡아서 믹서로 갈아버린다. 막국수의 본령은 집에서 그냥 대강 해먹는 요리인 터라, 예를 들어 가평의 송원막국수처럼, 정말이지 집밥 너낌 나는 맛집도 있다.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되, 그렇다고 남들이 가란대로만 갈 필요도 없다. 양파와 마늘, 그리고 파를 절여 만들어놓은 간장. 그리고 남은 건 꽤 많은 양의 설탕과 약간의 참기름, 그리고 넉넉히 고춧가루를 부어 휘휘 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또 맛도 있다. 만든 공정만 보더라도 맛이 없을 순 없긴 해. 여기에 들어간 채소가 쥬스 포함, 마늘과 파까지 일곱가지다.

그리고, 수박까지 먹고 나서 한숨 늘어지게 잤다. 전날 아이가 조금 늦게 잠들었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주욱 하루를 보낸 터라 잠이 모자랐다. 침대에서 눈을 뜬 건 밤 여덟시. 바깥양반이 배고프다며 잠꼬대와 비슷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침대에서 튕겨일어났다. 맛난, 저녁이 마련되어 있으니까.


메밀면을 찾아본다. 두개의 메밀면이 각각 1.5인분가량씩 남아있다. 한꺼번에 삶아서 채에 내린다. 물이 끓는 사이에 동치미를 김치냉장고에서 꺼내, 한국자 반씩을 먼저 국물을 담아서 막국수에 쓰기로 하고, 따로 또 한통 내어놓는다. 겨울을 보내고 난 동치미의 여름맛이야말로 뭐라고 해야 하나, 조상님들의 지혜랄까. 물론 옛 시절엔, 시원한 동치미가 아니라 그냥 무짠지 상태로 어지간히 푸욱 익어버린 무를 먹는 게 전부였을 테지만. 그렇게 김치의 모태가 된 무짠지가 동치미로 화해 4계절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현대사회다.


여기까지 흔한 동치미 빌런의 찬양글이었겠다면...이제 막국수를 낼 차례. 면을 채반에서 건져내 올리고, 미리 삶아둔 단 하나의 삶은 계란을 까고, 동치미무도 살짝 얇게 저미어둔다. 그리고 양념장. 그리고, 어쨌더나 저쨌더나 일단 만들어는 둔 수육과 육수. 이렇게 단촐하면서도 과잉한 비빔막국수 고명을 만들어 올린다.

"얼른 나와."

"응."


담아내놓고 보니, 역시 비빔막국수라 비주얼은 꽤나 예브다. 희고 붉고 노란 색이 한 그릇에 어우러지니 사철 언제 만나도 기대가 되는 식단이 아닐 수 없지. 고명으로 만든 수육도 마저 썰어 식탁에 올린다. 막국수 비빔장에 겨자를 풀었다. 이럼 조금 백촌막국수 비슷해지려나. 다만 수육이 너무 푹 삶아진 것인지 잘 익어버려서 식당 고기처럼 얇게 저미어지진 않는다. 기회가 된다면 껍데기가 붙은 머릿고리로 수육을 해보고 싶은데 말이지. 그 부위가 수육 만들기 딱 좋다.


"아 너무 매워. 맛있는데 너무 매워."

"그래? 고기도 좀 먹어."

"아 양념장 찍어먹어야 되잖아. 지금도 매운데 고기 못먹겠어."


다만 손수 만든 비빔 양념장이 바깥양반에겐 다소 매웠던 듯. 그리고 내가 애초에 고명을 꾸미는데에만 집중해서, 양념장이 조금 넉넉히 올라간 면이 있다. 저-기 어디냐. 깃대봉 냉면이라고 생각하며 먹어달라고 하기엔, 좀 염치가 없지. 그럼에도 바깥양반은 면 하나 남기지 않고 뚝딱 한그릇을 비웠다. 남긴 건 삶은계란. 내가 그것을 먹어치우자 바깥양반은 이제 아이와 마음 놓고 놀아준다.


최선을 다한 저녁식사다. 성공일까? 일단, 맛은 성공.

그리고 최선을 다한 저녁식사였기 때문에, 이상의 경과엔 아이 이유식 제조가 함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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