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감의 빈자리와 영화 문법 부족의 한계
월트디즈니 사의 90년대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말 그대로 혁신이었다. 일요일 만화극장에서나 보던 디즈니 "만화영화"가 놀랍도록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게다가 풍성한 애니메이션으로 살아나 극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이다. 인어공주, 미녀와야수, 알라딘, 라이언킹으로 이어지는 90년대 초반의 전성기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정말로 다른 제작사들에게 있어서는 범접이 불가능한 경지였다.
그래서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에 대해서, 나는 빤히 속이 보인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디즈니의 부활을 알린 인어공주부터 황금기였던 미녀와 야수, 라이언킹. 이들을 영화로 옮김으로써 이미 한번 돈을 뽑아먹을만큼 뽑아먹는 작품으로 또 돈을 벌어먹으려는 뻔함, 그리고 디즈니의 아이덴티티 속에서 제작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들은 대개 시도해보았다는, 이해가 가능한 부분. 그러나 아직까지 실사영화에서 성공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가장 흥행한 알라딘 조차도 사실 뮤지컬의 현장감과 함께 애니메이션으로만 뽑아낼 수 있는 표현력을 영화에 담아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
디즈니조차도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는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다고 보이고, 게다가 <캣츠>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재앙이 발생한 것 역시도, 문제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이 애니메이션의 그것, 뮤지컬의 그것과 매우 다르며 그래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프로젝트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검증된 각본과 이슈를 통해 안정적인 흥행성적을 원하는 제작자와 투자자들의 욕구, 혹은 실사화 작업이 갖는 고유의 장점이 나름은 있기 때문에, 여기, 또 하나의 실사영화화가 이루어진 작품이 있다. 본래는 2020년, 아마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미루고 미루다가 2022년 말에 개봉한, <영웅>이라는 영화.
뮤지컬을 보지 않은 입장에서 사전정보도 거의 없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영웅>을 영화문법적으로 감상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는, 뮤지컬 영화로서 한계는 제법 많다.
우선 넘버가 너무 적고 매끄럽지 못하다. 감상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뮤지컬은 넘버가 상당히 많은데, 이런 넘버들을 쳐내고 감독이 추가한 분량이 괜찮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
넘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원작에서 중국인 왕웨이와 링링을 중심으로 구성된 만두 관련 넘버인데, 조선인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인 협력자, 식당 주인으로서는 아무 문제 없는 장면 구성과 곡이지만 영화에서는 우선 왕웨이가 아닌 조선인 마두식이라서 그 곡을 이끌어간다는 게 문제.
<레미제라블>의 떼나르디에처럼 당대의 프랑스의 타락한 도덕을 해학적으로 나타내는 요소도 아니고, 바로 직전의 독립군 주둔지 폭격과 괴멸 씬 이후에 소수만 살아남은 독립군들이 모여서 갑자기 평화로운 만두타령을 시작하니 상당히 몰입을 깬다. 뮤지컬 원작에서는 이미 이 시점에서 상당히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어 있던 탓에 적절히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는, 그것도 <레미제라블>의 떼나르디에의 첫 등장과 비슷한 구성이지만, <영웅>에서는 딸랑 이게 세번째 넘버다. 안중근과 설희의 메인 넘버 하나씩, 그것도 각각의 서사에 상당히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배치된 다음 독립군의 만두타령이 나오니 이걸 뭐라고 해야할지. 마두식의 두번째 넘버도 상당히 문제가 있는데 가사가 구려도 너무 구려서 그 시점에서 몰입을 깨는 부분. 가사만이라도 손을 댔으면 두번째 넘버는 살렸을 테지만.
영화로 옮겨오면서 원작의 허술한 서사가 문제를 상당히 남긴다. 초반부에 안중근 의사가 의병장으로서 일본인 포로를 석방시켜주는 장면, 그리고 석방된 포로가 길을 알려줘서 독립군 주둔지를 공격받는 장면. 이건 너무 뻔한 발상인데다, 기본적으로 포로는 석방이 아니라 교환을 하는 것이고, 이렇게 자기들 위치를 훤히 알려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는 것인지. 설희 파트에 민비 관련 장면도 미화 논란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고, 설희가 이토를 암살 시도할 때 역시도, 아니 이토를 왜 이 시점에서 살해하려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설희가 잡힌 이상 수색이 이루어질 텐데 모스부호를 주고받던 무전송수신기는 그 전에 기차 밖으로 던져버렸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자기 마지막 임무라면서.
뮤지컬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그것을 극장 스크린에 내거든 건 전혀 다른 장르에의 도전이다. 그 시도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당연히 사려라는 것을 섬세히 채워야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나 윤제균이 윤제균한 영화의 한계라는 생각. 이것이 극명히 드러나는 것은 영화의 타겟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대중적으론 유치하고 뮤지컬에 비해서는 몰입을 깨는 요소가 너무 눈에 밟히고, 넘버는 반으로 줄어서 노래 기다리랴, 의거 기다리랴, 지루하게 러닝타임이 흘러간다. 초반부의 통속적이고 허술한 구성, 중반부의 활극을 보면 청소년을 타겟으로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12월에 개봉을 한 것일까 싶다. 현충일이나 광복절 시즌에 개봉을 했으면 체험학습 차, 역사교육용으론 충분히 청소년용으로 좋은 영화고 나름으로 "뽕"도 채워질만하니 흥행성적이 훨씬 나았을 텐데, 어째서 연말에. 혹시 <레미제라블>이 2012년 연말에 불러일으킨 민중의 노래 신드롬이라도 기대한 걸까.
적절한 각색이 이루어졌다면, 이토와 안중근 의사의 사상적 대결이 극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사상적 투쟁을 영화에서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토의 넘버와 안중근의 넘버가 서로의 색채를 강화하고, 2중창으로 각각의 시공간에서 대화를 하듯 넘버를 뽑아냈을지도.
뮤지컬에서야, 안중근 의사의 동아시아 평화론을 넘버로 만들기도 어려우니 뺄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가능하고, 또, 해야했던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영화 내내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니 최후에 법정 씬에서의 변론도 그저 익히 알려진 뮤지컬 넘버의 반복일 뿐이고, 왜 안중근 의사의 간수는 그에게 감화되었는지도 설득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최후의 장면은 사형대 자체가 너무 뮤지컬 무대 적이어서, 이게 영화를 보고 있는지 뮤지컬 촬영본을 보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따름. 사형대는 최대한 적게 잡고 차라리 수감실에서 사형대까지 가는 과정에서 회상씬이나 다른 인물들의 장면을 교차편집했다면, 훨씬 좋은 장면이 나왔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좋은 취지를 가진 작품이지만, 그 취지를 인정받고 싶었다면 좀 더 좀 더 치열한 고민을 하며 영화를 만들었어야하지 않나. 원작이 있는 작품을 2차 창작하려했다면 원작에 대해, 안중근 의사에 대해, 보다 리스펙하는 태도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