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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11. 2023

목적과 의미의 생태학, <아바타 : 물의 길>

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

“쿼리치 대령 디에이징 처리 좀 해주지…”


라는 게, 내가 아바타 2편의 장중한 대자연의 정경 묘사 뒤 느낌 영화의 첫인상이었다. 2007년에 촬영된 전작에서 불과 60세의 장년이었던 그는 2017년에 촬영된 속편에서 10년의 세월을 반영한듯 훌쩍 나이먹은 모습으로, 전작의 마지막 출격 전에 찍은 장면라고 보기엔 상당히 어색함이 있었다. 디에이징 처리만 했어도 영화 초반에 이처럼 몰입을 깨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 정도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걸까? <아바타>처럼 시각적 체험을 중시하는 영화에서, 판도라의 생물종들에 대한 도착적인 세부묘사를 시도한 사람들이?


 나는 이것이 캐머런 감독이 보여주는 특유의 단순명쾌한 영화관이라고 생각했다. 사상 최강의 흥행감독인 그는 어느 정도는, 생략을 할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는 특성이 있는데 <트루라이즈>에서 무성의한 이슬람 묘사로 무슬림 국가들의 폭발적인 분노를 부른 바도 있고, 전작인 <아바타>에서도 제이크 설리가 토루코 막토가 되기 위해 붉은 이크란을 덮친 뒤의 장면을 그냥 생략하고 떡하니 그가 부족 앞에 나타나는 장면으로 이어놓은 바도 있다. 초기부터 늘 예산부족을 초래하는 대형프로젝트를 들고 나와 제작사와 씨름하던 이력 때문에, 완벽주의자임에도 아낄 수 있는 부분은 꽤나 아끼는 면모도 있다. 아마도 그런 그의 특징이, 쿼리치 대령의 늙은 얼굴 쯤은 무시하게 된 배경이 되지 않을까. 시고니 위버 배우가 너무 늙지 않은 외모로 나오신 탓도 있고 말이다.


 10년이나 늙어버린 쿼리치 대령의 모습만큼이나, 이 영화엔 감독과 제작진이 미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맥락에서, 내가 보기엔 선택과 집중이라는 코드에 따라 감독이 의도한 연출과 메세지의 과잉된 장면배치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일부 극중 장치가 왜소해진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바타 프로젝트에 13년의 시간을 바친 거장에게는, 그가 평생 원칙으로 삼았던 서사의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문제는 이제 조금, 부차적인 문제가 된 것인 것처럼.

 <아바타 : 물의 길>은 결국 캐머런 감독이 "물 부족과 바다를 그리고 싶어!"라는 열망 하나로 시작되고, 그것이 충족되어 끝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서사도 캐릭터도 그냥 이 목적에 투여되고 끝났다. 설리 일가가 숲의 모아티카야 부족을 떠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선택이며 그렇다고 그가 떠난 곳에서 의미있는 행보를 보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바다의 멧카이나 부족이 휘말린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톨쿤이 목숨을 버려가면서 무저항 원칙을 고수하며 포경선에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그저 서사의 장치일 뿐이고, 단 한척의 포경선이 한쪽 바다에서 평화롭게 톨쿤들을 포획할 때 그 바로 옆바다에선 평화롭게 한 무리의 톨쿤들이 행복을 즐긴다. 서사에는 구멍이 숭숭 뚫리고, 모든 사건은 제이크 설리와 로아크 둘의 뻘짓으로 시작되고 뻘짓으로 끝난다. 영화 초반부터 뻔히 예상이 되긴 했지만, 설마 끝까지 인질극 하나로만 갈등을 풀어갈 줄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사와 개연성을 버리고 캐머런은 3시간 동안 판도라의 묘사에 온전히 집중한다. 특히 중반부에 설리의 자식들이 판도라의 바다에 적응하는 과정은 이 영화가 SF액션활극이 아니라 생명을 주제로 한 해양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 영화가 서사에 털끝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3시간의 러닝 타임 중에 1시간은 고스란히 비워내는 것이 옳다고 봐도 좋을 만큼 판도라의 자연에 대한 묘사는 과잉되어있다. 아이들과 바다 시퀀스는 심지어 로아크와 키리, 설리와 네이티리의 바다 마을 생활을 번갈아 묘사해주다보니 장면이 뚝뚝 끊기기까지한다. 중반부의 연출과 편집은 그래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편집은 표층에서 심층으로, 점차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과정에 따라 배치된 것으로서, 표층에서 방황하던 로아크는 심층 혹은 원해에서 파야칸이라는 친구를 만나며 영웅으로의 길을 발견하고, 반대로 키리는 표층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뿜어내다가 심층으로 향할수록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느끼게 되고 그에 따라 방황을 겪는다. 이러한 각 캐릭터의 내러티브가 바다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흐름에 의해 보여진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아바타 : 물의 길>은 바다에 대한 영화다. 판도라의 바다.


 영화는 대중예술이며 감독이 반드시 대중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캐머런의 이러한 옹고집을 순치하는 것은 가족주의와 어린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이다. 네테이얌은 로아크를 위해 소모된 캐릭터가 있지만 그의 존재로 인해서 로아크의 막나가는 기행에도 어느정도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으며, 그의 도움 속에 키리와 로아크, 투크, 그리고 스파이더가 각각의 모습으로 판도라의 바다를 유영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단지 외계 해양 다큐멘터리로 끝났으면 대중성이 상당히 훼손되었을 영화지만, 극을 이끌어나가는 설리의 자식들이 그 안에 있어 장면 장면이 이어지고 긴장과 이완이 순환된다. 그리고 아이들을 방패 삼아 캐머런 감독은 최대한 불친절한 방식으로 판도라를 그리려는 줄타기를 계속한다.


 판도라의 자연을 그리려는 집착에서 파생된 서사와 캐릭터의 희생, 그러나 영화가 고유한 의미가 없냐고 하면, 나는 그렇진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한 아버지가 자신의 가족을 얻게 되면서 겪는 정체성의 변화, 지구인과 판도라인 사이에서 겪는 아이들의 정체성의 문제, 지구인이되 판도라인이 된 이들의 정체성 문제까지, 전편이 갖는 고유의 주제의식을 여전히 잘 살려내고 있으며, 이는 각 캐릭터들을 통해 확장되었다. 나비족 클론으로 살아난 쿼리치 대령은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고, 누가 봐도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모사한 키리는 꽤나 쉬운 독해와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가족이 생기면서 설리에게 판도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해짐에 따라, 그의 행동에 목적과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점도 본작의 특성이다. 이것은 속편으로서 이번 영화가 전편을 안정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관람객들이 제이크 설리를 지구인의 배신자, 외계인에게 빠져 지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변태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해왔으며, 지구로 돌아가 다리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해준 쿼리치 대령의 지시를 거부하고 끝내 나비족이 되는 것을 택한 그의 결단에 대해서 의문부호는 내내 따라붙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제이크는 답답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한 가족의 아버지이자 진정한 나비족의 일원이 되었음이 보여졌고, 그가 살아가는 과정이 다양하게 보여졌다.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사냥을 하고,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선택을 이어나가는 모습.

 

 즉 <아바타 : 물의 길>은 제이크 설리라는 한 인간이 살아나가는 방식을 판도라의 자연과 함께 생태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태학적이라는 용어는 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조건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말이다. 여기에는 과거의 기억, 미래에 대한 희망, 현재에 대한 평가와 해결책 모색 등이 문화나 물질적 구조와 함께 포함된다. 인간을 생태학적으로 관찰한다고 할 때 자연환경이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판도라의 숲과 바다는 나비족을 둘러싼 환경으로서 "생태"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제이크 설리의 나비족으로써의 삶에 자연풍광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브론펜브레너의 생태체계이론 모형

 이렇게 말하고 보니 앞에서 말한, 해양다큐를 위하여 서사를 희생했다는 평가는 반박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전작 <아바타>에서 제이크 설리가 나비족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렸다면, 이번 <아바타 : 물의 길>이라는 영화에서는 제이크 설리가 나비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왜 그는 싸움을 계속하는가를 그리려 하는 영화이고, 캐머런 감독은 그것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설리와 가족, 설리와 마을, 설리와 판도라, 그가 걸어온 과거와 앞으로 지켜내고자하는 미래까지.


 나비족이 된 제이크 설리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판도라가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하고, 판도라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싸움의 의미와 목적을 알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영화는 판도라를 "체험"시키는 것에 크나큰 투자를 하게 된다. 아니 판도라가 어떤 곳인지를 관객인 우리들도 알아야, 앞으로의 제이크 설리의 싸움을 응원하든가-몰입하든가 말든가하지. 그냥 파란색 외계 거인족들에 과몰입해서 설리를 응원하라고? 조금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아바타 : 물의 길>이 자신의 목적에 충실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로아크니 키리니 말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설리이고, 로아크와 스파이더 등의 행적은 설리에게 발생한 외부의 사건들에 불과하다. 죽어라 말 안듣는 자식이 있었고, 도망가도 따라오는 추적자들이 있었고, 결국 그를 받아준 바다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을 잃었고, 그러나 남은 자식들이 있다. 이제 제이크는 자신의 싸움의 의미를 다시 받아들였고, 영웅서사의 순서로 보았을 때는 비범한 탄생에 이은 고난의 시작이다. 3편과 4편에서는 이번 작품에서는 부족했던 영웅의 여정과 위업이 보여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캐머런이라는, 3D와 아이맥스라는 포맷을 그냥 재정의해버린 거장의 작품에 구멍난 개연성과 박살난 캐릭터들이라는 한계가 발견되는 것은, 또 퍽 재미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대단히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환갑 넘긴 윌리 웡카 아저씨라고 할까. 속이 빤히 보이는 해양 애호가의 덕질생활로 인해 발생한 부산물들이 눈에 밟히는 것은 잠시. 진짜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에 어느새 러닝타임이 훅 지나가, 끝까지 긴장을 놓기 어려운 결말로 향한다. 이렇게 영화를 내고도, 전세계에서 20억달러를 벌 기세로 달려가니. 오 영화의 왕이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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