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하면서 켠 넷플릭스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할 독서의 경험이다. 모든 사건이 끝난 뒤 마을을 쓸어보는 스카웃의 시선에 대한 묘사는 스릴 넘치던 성장소설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아이들은 성장했고, 이제 그들이 살아온 마을은 몸과 마음의 부쩍 자란 길이 만큼, 그 색채와 모양이 달라져있다.
<앵무새 죽이기>가 갖고 있는 여러 정체성 중에서도 성장소설로서 탁월한 점은 아마도 그 마지막 마을에 대한 장면묘사일 것이다. 독서가로서 소장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 또 직업 사정에 따라 이따금 그 책을 다시 펼쳐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처녀작인 <파수꾼>에 이어 고작 두편만에 이런 걸작을 남긴 작가의 천재성에 거듭 감탄할 뿐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그 마지막 장면에서 풍성한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젬과 스카웃의 여정을 내가 충실히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에티커스와의 대화에, 무고한 톰의 탈주와 죽음에, 부 래들리의 비밀과 그의 정체와 그 반전에. 모든 이야기는 젬과 스카웃의 생생한 체험으로 아이들의 우주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긴 여정을 따른 끝에, 나는 마침내 메이콤의 큰 길가에서 두 아이와 작별을 맞이하며, 책장을 덮는다.
<스탠 바이 미>는 슬픔이 듬뿍 담긴 아름다운 성장담이다. 장년이 된 주인공 고디가 누군가의 피살 소식을 신문으로 읽은 뒤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내 각자의 한계를 듬뿍 가진 네 소년이 나무 오두막에서 담배를 피우며 트럼프를 하는 모습으로 흥미를 돋운다.
이쁘고 피둥피둥하기만한 네 소년은 각자, 큰 형의 느닺없는 죽음으로 존재가 소멸된 소년, 2차 대전 참전ㅇ으로 인해 생긴 PTSD로 인하여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이, 동네에서 소문난 양아치인 형과 알콜중독 아버지로 인해 모두의 질시를 받는, 이 무리의 대장, 그리고 뚱뚱한 외모에 행동도 굼뜨고 형에게 심한 학대를 받는 마지막 아이다. 네 아이들은 각자 서로의 상처를 어떻게 교묘하게 놀리고 구성지게 욕을 하는지를 겨루며 낄낄대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는 아이. 소년은 소년. 툭 하면 각자의 가둬진 감정은 거센 슬픔과 함께 터져나온다.
영웅이 위업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듯 네 아이들에게 실종된 소년의 시체를 찾아낸다는 모험은 필연이었을까. 우연히 번의 형에게서 엿듣게 된 시체를 찾고자 네 아이는 캠핑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수십 km 떨어진 곳까지의 도보여행을 시작한다. 각자 집에서 털어온 돈은 모두 합쳐 고작 몇 달러에 불과하고, 이들은 선로에 서서 열차를 마주하고 고물상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다가 쫓겨나는 등의 소동을 벌이며 점차 서로의 약점을 보듬는 관계로 변해간다.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점, 그리고 특별한 점은 네 소년 모두 실제로 성장을 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한계로 인해 좌초하기만 하고, 위안은 엉뚱한 곳, 고디의 뛰어난 재능인 이야기꾼으로서 펼쳐낸 이야기에 환호하는 것으로 얻어진다. 동화나 소설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처럼.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약점들을 극복하기보단 어찌어찌 그것과 함께 살아가며 견디는 것에 그친다. 그로 인해 좌절을 느끼고 더 나은 삶을 향한 꿈을 꾸지 못하는 때가, 그러지 않을 때보다 많다. 그런 경험들은 대개의 경우 잊고 싶은 시기, 피하고 싶은 기억으로 남는다. 다만 그 속의 위안이란 친구들과의 왁자지껄한 하루들 뿐.
어쩌면 <스탠 바이 미>라는 우수에 깃든 성장담은 가장 우리의 삶과 가까운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에티커스처럼 위대한 아버지를 두지도, 부 래들리처럼 아이들의 은밀한 수호자를 두지도 못했다. 평범한 아이들은, 시체 찾아내서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꿈을 이루지 못한다. 성공은 커녕 어렵게 찾아낸 시체를 보고 깊은 우울감에 빠지고 영웅이 되는 것을 끝내 포기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고, 슬픈 얼굴로 서로에게 손짓한다. 네 소년 중 두 아이는 어찌어찌 불량배 패거리의 공격을 이겨냈지만, 남은 두 아이는 줄행랑을 치고 나서 패배감을 느끼며 무거운 마음으로 친구에게 돌아온다.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이야기. 아무도, 끝내 웃지 못한 이야기.
그러나 고디가 성인이 되어 이 시간을 웃음으로 추억하는 것은 그토록 슬프고 서러움 가득했던 때문이다. 서로의 비참한 최후에서 친구의 이름을 기억해줄 마지막 한사람이,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도 좋다. 그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친구여, 너희들이 있기에.
슬픔은 슬픔대로 두어야 옳다. 극복은 한 아이가 영웅이 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의 마을이 온전히 아이들을 품을 때 이루어지는 것. 온 마을이 버린 네 아이는 상실의 기억처럼 내 마음에 간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