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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16. 2023

아이를 위한 보늬밤조림을 만들어보니

우리 동년배는 다 밤 까먹고 놀고 그랬다?

"샘샘 밤 많이 먹여요 아기한테 그렇게 좋대."

"헤에."


일은, 두달쯤 전에 친한 수학선생님과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그 댁께서는 아이가 이제 예닐곱살에, 영재반을 다니며 영어가 이미 꽤나 수월하다는, 똘똘한 아이. 그런데 선생님이 육아비결로 나에게 밤을 먹이라고 하니, 또 내가 조금도 귀가 얇지 않은 인간임에도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말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밤이니까 밤.


 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 동년배들에겐 아주 익숙하고 친숙한 영양간식 아닌가. 집에서 한 바가지 쌓아놓고 살살 까먹고 노는.


 내가 어릴 때는 밤을 생으로도 까머고 삶아서 먹기도 했다. 열살쯤엔 도루코 문방구칼로 내 손으로 밤을 까먹기 시작했다. 까먹다보니 벌레도 종종 발견하고, 그것을 낼름 발라먹으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밤, 밤은 라면과 볶음밥에 이어, 내 손으로 만들어 먹은 최초의 음식들 중 하나다. 아직 사과도 깎아보지 않은 나이에 밤 먼저 깎아먹었으니까. 내가 사과를 어릴 때부터 안좋아하긴 했지만서도.

 그리하여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마침 햇밤이라고 들여놨길래 발걸음을 멈추고 밤을 고르기 시작했다. 100그램에 650원. 싼가? 잘 모르겠다. 유심히 보며 벌레먹은 밤들을 골라낸다. 매대에 쌓여있는 밤들 중에는 팥알만큼이나 되는 구멍이 난 밤도 그대로 올려져있다. 다른 사람이 행여나 집어갈까봐 걷어서 저울 옆에 빼두었다. 사장님이든 직원이든, 알면 버려줄 것이고, 모르면 다시, 누군가가 골라내는 수고를 해야겠지.


 그러나 내가 실수를 했든, 아니면 아기가 아빠 흉내를 내며 밤을 여섯개 정도 집었는데 거기에 껴있었던지, 벌레먹은 밤이 아니 나오진 않는다. 하기사, 밤 까먹으면서 벌레 없길 바라는 게 우습다. 농약을 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밤이 익지 않으면 벌레가 들지도 않으니, 밤이란 처음부터 버레와 한몸인 것이다. 요령있게 골라내는 솜씨에, 밤의 맛이란 달렸다.

 그리하여 1kg 살짝 넘는 분량의 밤을 다 까니, 네 알의 벌레먹은 밤알, 거기에서 벌레 파먹은 부위를 골라내고도 열댓알이 남았다. 7천원이라고 치자. 이정도면 확실히 싼지는 모르겠다. 가격은 나에게 중요한 문제다. 아이에게 먹일 음식이므로 이왕이면 저렴하면 좋을 테니까.


 그렇다고 무조건 싼 밤만 사다가 깔 수도 없다. 뭉탱이로 샀다가 벌레 먹은 밤들에 눈탱이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 최선이자 최상의 방법은 오늘처럼, 내 눈으로 한알 한알 골라서 좋은 밤들만 추려내는 것이고, 그러자면 어느정도의 가격은 예상해야 한다. 그래도 뭐. 이정도...6천원으로 이정도 분량이면 퍽 만족스럽다. 맛밤 한봉지에 얼마더라? 그보단 확실히 저렴하다. 껍질을 남긴 보늬밤들은 베이킹소다 한스푼과 함께 물에. 그리고 벌레를 먹은 밤들은 잘 까서 물에 담가두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야. 깐밤들에겐 내일의 미션을 부여한다.

 다음날 아침...나는 밤을 삶으며 숟가락으로 탁탁 쳐서 부순다. 그리고 자작하게 졸인다. 그보단, 살짝 태운다. 그냥 밤을 삶기만 하면 풍미가 충분하지 못할 것이므로. 살짝 밤을 그슬러서, 군밤의 향을 흉내내보는 것.


 그런다음엔 밤을 갈아내고, 우유와 함께 한소끔 끓인뒤, 설탕을 유감없이 섞기만 하면 끝. 바깥양반을 위한 아침 특선 밤라떼 완성이다.

 나에게 한편으로 밤은 어린 시절 1년에 여덟번이나 있던 제사의 기억과도 뿌리가 닿아있다. 밤이 되어 큰집에 가면 늘 첫째 큰아버지께서는 안방에 앉아서 밤을 깎고 계셨다. 어찌 그리 큰아버지의 밤은 한결같이 모양이 예쁜지, 제삿상에 잘 쌓아올려지면 흐트러짐이 없었다. 나이를 먹고 큰아버지처럼 그렇게 밤을 깎으려고 해도 어림이 없다. 고인이 되신 분께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보단, 일반적으론 그렇게 모양을 내서 깎으려면 많은 손실율을 감내해야겠지. 나로선 못할 일이다. 값나가는 밤을 골라 알뜰살뜰 속껍질을 잘 깎아내는 것이 열살때나 지금이나 최선.


 밤라떼가 다 끓었다. 바깥양반을 깨운다. 그리고 나는 밤 새 베이킹소다로 떫은맛이 잡힌 밤을, 이제 삶기 시작한다.

 구증 구포는 아니고 삼증 삼포려니, 베이킹소다 담궜던 물을 그대로 써서 첫번째 30분. 그리고 헹궈낸 새 물에 30분씩 두번. 이렇게 세번을 끓여야 밤조림의 밑작업이 된다. 보통은 여기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번거롭다고 저어하나본데, 나로선 이게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주방살이야 그렇지 뭐.


 고구마며 밤이며 시장에서 사와서 조리해 먹는 간식들은 사라지고 간단히 봉지만 뜯으면 되는 과자류가 온통 간식 시간을 차지한 세상에선, 밤을 까는 일조차 노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 그런 와중이니 밤 조림이라고 달가울 리가 있나.


 그러나, 간단히, 밤에, 밤껍질을 까고, 밤 사이에 열두시간 정도 베이킹소다와 함께 불렸다가, 30분씩 세번. 그리고, 속껍질의 털과 심을 발라내는 아주 단순한 작업 시간.

 한편으로는 또 내가 밤조림을 만들기로 한 건 무려 5년은 되었나?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가 밤조림을 만드는 것을 보았던 때였던 것이다. 그 영화 속에서 꽤나 자세히 밤조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때도 내 머릿속에서는 "베이킹 소다는 집에 없는데 어떡하지?"라는 질문 정도가 멤돌았을 뿐, 이 공정에 대해서는 크게 우려한 바는 없다. 아기를 돌보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오며가며 불만 봐주면 되는 일이니까. 게다가 요즘 세상엔 주방용 전열기구가 많고 타이머까지 있다는 사실.

 다 되었다. 껍질 까는 것보단 훨씬 수월한 작업이다. 이쑤시개로 살살 심도 털도 벗겨낸 뒤에 이제 드디어 마지막 작업이다. 밤의 1/2 분량의 설탕, 적당량의 물을 붓고 약불에 살살살살 졸이는 시간이다.


 간장 한 스푼. 그리고 와인을 넣으면 좋다는데, 집에 있던 와인은 사~앙당히 오래 전에 마셔버린 모양. 궁여지책으로 아기에게 포도쥬스를 먹이고 남은 분량을 넣으려고 했는데...아기가 쥬스 팩을 붙들고 안놔준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기본 메뉴로만 만들어야지. 와인도 포도쥬스도 포기다. 그렇게 이제 보늬밤, 밤조림이 완성이다.

 아기가 맛밤을 제법 맛있게 먹길래 비슷한 군밤 제품을 열개 정도 사다놨더니, 그건 또 먹지를 않는다. 이건 잘 먹어줄까. 늘 아기를 위해 만드는 음식에는 아빠의 근심이 스치운다. 벌써 버리고 또 버린 한우다짐육들이여. 또 아빠의 근성으로 만들어낸 카레여, 야채죽이여, 닭가슴살들이여.


 그러나 이번에 아기가 그리 맛있게 먹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또 다시 새로운 메뉴로 도전하면, 그럼 또 밤을 맛있게 먹어줄 때가 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또, 그 요리에 또 도전해보면 될 것이고. 어쨌든, 밤 조림은 즐겁다. 중간에 밤라떼를 만들 수도 있고, 밤밥을 만들어도 되고, 아예 제대로 와인에 졸여도 될 것이다. 하다보니 그리 어렵거나 고되지 않아, 다음엔 제대로 한 됫박을 사 와서 푸짐하게 만들기로 했다. 좋은 밤들로 골라서.


 우선, 생강청귤차 한잔 끓여서 바깥양반에게 나의 첫 밤조림을 진상한다. 아마도 그것은 부드럽고 보드라운 달콤함이겠지. 우리 아기의 볼살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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