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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26. 2023

결항, 눈 길을 달려

제주도 1일차

 이 정도면 한달을 버틸까. 나는 아이를 재우고 나와서 겨우, 내 시간을 갖는다. 시간은 이미 늦어서 밤 10시. 아이는 졸려서 눈을 부비면서도 좀처럼 이불에 몸을 묻지 못했다. 그럴만도 하지. 새 집에 와서 신이 나 구석구석 뒤져보고 싱크대 아래 서랍마다 몸을 끼워넣었으니까. 에어매트에 바람을 넣어서 만들어준 아이 잠자리는, 그런데 베란다 통창으로 외풍이 제법 불어온다. 나는 아이를 재우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수시로 들어가, 덮어준 이불이 아직 온전히 아이 살갗을 감추어주는지를 살핀다. 보일러는 아직, 뜨끈해지기 전. 그나저나 어떨까. 이 커피면 한달을 버틸까. 부족해질 것 같으면 급하게 콩 좀 사야겠다. 


 자리에 앉았다. 바깥양반은 아주 편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고딩엄빠라는 프로를 보고 있다. 시민단체에서는 나쁜 TV 프로로 찍히기도 했다. 나도 동감이다. 나쁜 프로다. 미성년자의 피임 교육, 성윤리 교육이 충분히 되지 못한 것이 사랑과 책임이라는 키워드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바깥양반은 아기들의 모습에 공감하며, 성인보다 대여섯배는 힘든 어린 엄마아빠들의 육아 이야기에 자기의 육아의 수고로움을 위로받는다. 윤리적이지 못하나, 그 나름의 효용이 있는 이 프로를, 어째야 하나 모르겠다. 일단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자기 목소리가 있는 법이니, 미성년자 임신 사례도 우리 사회에, 조금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자리잡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그 사이에 나는 수시로 남의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를 살핀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내가 잠자리에 들어갈 때는 아이를 우리 침실로 데리고 오기로 한다. 


 그 결과, 아이는, 아빠 몸덩어리에 낑겨서 자기 멋대로 구르지 못해, 자다가 깨서 한참 울며 칭얼댔다. 에어매트를 우리 방으로 꺼내와서 자리에 눕히니 그제야 편하게 솜을 고른다. 원 녀석. 

 길은 최악이었다. 지난 여름 완도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것도 최악의 폭우를 뚫고 한 50km를 달렸는데 이번엔 더했다. 전라도에 접어들어 100km 정도가 심각한 눈길이었다. 제설도 되지 않았다. 어제 밤새 남부지방에 내린 폭설과 눈보라가 실감이 났다. 다행이 평일 오전 시간이라 길이 막히지 않았지만 도통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나마, 그나마 내려올 수라도 있으니 망정이다. 어제 내려올 예정이었는데 결항이 되었다. 하루 여유를 가진 것이 우리에게도 다행이지만, 한달살이의 일정에 하루가 빠진 것은 그래도 아쉽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길을 아빠는 조심히, 아이는 그럭저럭, 엄마는 힘들게 달린다. 겨울 짐은 차를 가득 채웠다. 제주도라지만 겨울바람에 문을 열어둘 순 없고 그래서 모두 닫아둔 공간에 습도는 중요한지라 큼지막한 가습기까지 챙겨온 길이다. 김치 세 포기 반, 아빠의 커피드립세트, 엄마의 과자 등등. 무거운 차량에 눈길은 무섭고 마음은 오로지 무사함을 바란다. 아차, 하고 살짝 위태로운 순간도 한두번은 있었다. 조심해야지. 아이가 타고 있다.   

 완도까지 와서 비로소 차를 돌아보니 엉망이다. 눈길이 실감이 난다. 워셔액은 동절기용이 아니었던지 얼어붙었다. 그래서 눈보라에 앞창유리가 덕지덕지 떡이져서, 어떻게 이 상태로 여기까지 왔는지. 바퀴마다 고드름, 문짝마다 눈이 붙어있다. 이렇게 한 일곱시간을 왔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난 아빠의 피로함은 졸음운전 코앞에서 겨우 멈춰섰다. 드디어 항구에 도착, 해서, 그러나, 어제 결항으로 인한 여파로 배는 붐비고 차량 선적 역시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아빠는 물론 알고 있다. 배에 올라도, 나는 단 1분 쉴 수 없음을. 차에서 넉넉히 잠을 보충한 아이는 두시간 반 뱃길을 내내 달렸다. 나는 또 아이를 따라 놀이방에, 우리 객실에, 계단에 따라다닌다. 겨우 숨을 돌리고 바깥양반에게 아이를 맡기니, 딱 그 순간 스피커에서 하선 알림이 내린다. 제길. 

 자아,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휴가다. 겨울, 제주도, 한달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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