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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29. 2023

아이는 눈사람을 만났다.

제주도 3일차

 허리를 펴며 뒤를 보니 돌아온 길엔 고스란히 내가 눈을 굴려온 흔적이 이어져있다. 제주도엔 마침내 폭설이었고, 나는 아이에게 첫 눈사람을 선사해줄 날이 바로 오늘이라고 생각했다. 눈덩이는 쉽게 굴려졌다. 설경을 구경하기 위해 찾은 카페는 주차장으로부터 건물까지 낮은 언덕을 잠시 걸어야 했다. 50미터나 될까 싶은 그 길을 잠시 걸으며 허리를 굽혀 눈덩이를 굴리는 것만으로도, 농구공보다 큰 눈사람의 몸통은 만들어졌다.


  물론 이 눈사람엔, 순수한 눈만 들어가진 않았다. 1/5 정도는, 못해도, 상당히 적지 않은 분량의 모래자갈이 눈사람에 섞여들어가있다. 카페 앞에까지 도달해서는 덕지덕지 붙은 돌맹이들을 가리기 위해 눈을 떠서 팡팡 손으로 두드린다. 장시 뒤엔 핸드볼 공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머리통을 만들어, 올려두었다. 카페에 먼저 도도착한 나와 일행이 카페 구경, 설경 구경을 하며 나머지 일행들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말고도 손님들은 카페에 하나 둘 도착했고 그들은 나의 대강 만든 눈사람을 찍었다.  

 우리의 한달살이에, 아내의 친구 부부 두 팀이 함께 잠시 머물기로 하였고, 오늘은 그들이 제주도를 돌아보는 첫날이었다. 방학에 한달씩 내려올 수 있는 우리의 속 편한 처지와 달리 한쪽 부부는 휴가를 이틀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아 목요일 퇴근한 뒤 밤 비행기로 제주도에 왔고, 금요일인 오늘, 몇통의 업무 전화를 그는 받았다. 그들에게는 야속한 날씨이되 나에겐 마침내의 제주도의 설경이다. 12년 전 처음에 제주도를 와본 뒤에 진눈깨비며 싸리눈이며는 여러차례 구경해본 일이 있다만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은 처음이다. 하여 나는, 이것이 우리의 여행에도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덕분에 배 역시 결항되어 하루를 버리긴 했지만서도 말이다.


 자연은 늘 유유자적 그대로일 뿐이다. 거기에 맞서 도시와 일정을 세운 사람들만이, 눈을 원망하며 바람을 원망한다. 그러나 나에겐 만일 단 하루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어디든, 그곳의 자연과 풍경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여행에 있어서 우선되는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그곳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 길을, 담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눈 내린 비탈길을 올라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맞으며 어렵게 어렵게 차를 몰아 올라갔는데 사려니숲길은 입장이 통제된 상태. 아쉬워하며 차를 돌리려다가 바로 옆 어린이 생태학습장은 막혀있지 않은 걸 보았다. 차를 잠시 세워 아이에게 옷을 입혀 달려갔다. 그러나, 눈밭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으려니 아이는 잠투정과 겁이 난 것이 섞여서 바로 울음을 터트린다. 얼른 안아주고 달랜 뒤, 아주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어준 뒤 다시 안았다. 자연처럼, 아이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연을 길들이는 것이나 어린아이를 길들이는 것이나 '마음대로'의 문제는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자연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아이도 우리의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려면 탈은 난다. 아이에겐 이미 제주도까지의 여정이 원치 않는 고단함이었을 테다. 엄마 아빠랑 추운 방에서 겨우 자고 일어나니 웬 손님이 넷이나 와 있어서 잠을 깨고 난 뒤에 눈치만 보며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겨우 좀 편해지나 하니 이리 저리 자기를 끌고 다니는 부모의 손길에 아이는 원치 않는 추위와 눈보라를 맞아야 한다. 부모 욕심인 게지, 하면서도, 아이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고 흥밋거리가 되는 이 세상만물이 또, 반드시 나쁠 거라는 생각은 못하겠다. 그러고보면 아이를 기르는 것이 그의 본성을 꽃피우는 것일지, 아니면 분재처럼 엇나간 가지를 잘라주고 모양새를 예쁘게 잡아주는 것이 우선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부모의 뜻대로 키우느냐 아이의 뜻대로 키우느냐는 아마도 수만년은 묵은 고민거리 아닐지. 

 밤은, 김치전으로 했다. 저녁을 바다가 보이는 흑돼지집에서 먹고, 집에 와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야식 상을 차린다. 첫날은 딱새우와 생선회, 오늘은 무려 한마리에 5천원 하는 냉동 오징어를 사서 썰어 김치전. 근데 이 오징어가 꽤 재밌다. 농협마트에 가서는 냉동 오징어가 물경 두마리에 만원이나 하길래 놀라며 겨우 집었는데, 또 해서 먹어보니 굉장히 맛이 좋다. 생물이라고 해도 믿을 맛이다. 제주도에서 잡은 오징어일까 싶다. 먼 바다에서 잡아와서 냉동과 해동을 번갈아 한 놈이라면 이 맛일 리가 없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여기 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인데 지난번엔 채소들을 사다가 아이의 이유식을 했다. 이번에도 고구마와 당근, 호박 정도는 봐두고 있다. 어지간한 채소는 여기 것을 사다가, 아이도 먹고 우리도 먹으려 한다. 한치가 한 뭉덩이가 값은 나가지만 좋아보이는데. 한치 좀 사다가 해먹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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