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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31. 2023

동백꽃, 지다

제주도 4일차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바깥양반의 친구부부 형님은 일어나서 나에게 먼저 나가자고 제안을 한다. 다른 일행들은 어차피 일어나지도 못하니 시간이 아까워 먼저 나가자고. 그럴만도 하고, 식사하기로 한 식당이 여는 10시까지, 한시간은 충분히 차 한잔 할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이 되어 차를 끌고 먼저 나왔다. 9시에 여는 카페, 그 중에 돈이 아깝지 않을 카페는 어디냐. 


 잠시 고민을 하다가 협재에, 지난번에 가보고 퍽 마음에 드는 곳으로 형님을 이끌고 간다. 

 카페 뚜이는 두 해 전에 길을 걷다가 돌담 위로 삐죽 솟은 새빨간 지붕에 홀리듯 방문하게 된 카페였다. 그때도, 사진을 찍는 우릴 보고 사장님께서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성화셨고 오늘도 그랬다. 이 공간의 아름다운 외관에 이끌린 사람들에 비해 안에 들어가, 기꺼이 눈요기 값을 지불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듯했다. 그러나 그 정도 값을 치르기로 한다면, 나는 이 공간이 퍽 기쁨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엔 꼭 그렇게 계획대로 척척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우연히 길 가다 본 이런 카페가 인생맛집이 될지도 모르는 일. 그래서 나는 이 곳을 두번째로 찾았고, 아마, 두해쯤 뒤에 다시 여길 찾게 된다면, 그땐 아이를 데리고 와도 조금 더 여유롭게 있을 순 있겠지. 


 음악은 포근했고 햇볕은 느긋했다. 우리는 짧은 망중한을 즐긴 뒤 근처에 약속된 밥집으로 이동했다. 협재에서는 이름이 난 대문집이라는 곳인데, 갈치조림을 포함한 세트메뉴를 판다. 그런데 식당 사장님이 괴퍅하시기도, 온갖 사인들을 다 받아 벽이면 벽 천장이면 천장 빼곡하게 채워놨다. 한쪽 칸에는 이렇게 유명한 정치인들의 사인까지. 이런 분들까지 올 정도면 맛이야 보장된듯한데, 김무성 전 의원이 비서들과의 이별여행이라고 쓴 게 눈에 들어온다. 노룩패스로 한바탕 논란을 일으킨 양반이 이럴 때 보면 퍽 감성적이라는 생각. 인간은 단수가 아니지 싶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아침 일정이었다. 부지런히도 9시에 딱 집을 나서서 커피 한잔, 그 뒤에 괜찮은 식사. 그런데 또 다시 날씨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한달살이를 하는 우리는 그렇게 큰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3박 4일 일정으로 짧게 온 다른 두 부부들은 각기 5년, 2년만에 제주도를 오는 것이라, 그리고 휴가를 내기도 만만찮은 사람들이 한 집에 한 명 씩은 있어서, 이번 제주도 여행에 제법 기대를 했더란다. 그런데 눈이 와도 너무 오고, 도로가 폐쇄될 정도로 오고, 그래서 파란하늘은 개뿔, 잠시 드러났던 맑은 공기도 이내 먹구름에 가려버리는 일이 오후까지 이어지니, 우리 일행은 모두 다급해서 무리한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협재에서 바로, 서귀포로 간다!


 그러나 서귀포로 가는 것도 이유가 있고 의의가 있어야 하는 것. 우리는 동백꽃 철이어서 몇군데 투어 코스를 짜두었었다. 그래서 유명한 동백 명소 중 하나인 동백포레스트를 갔는데 이런. 동백꽃들이 모두 냉해를 입어서 검게 시들어있다. 


 나는 식물이 냉해를 입어 축 늘어진 것을 거의 처음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3,4일간 영하권의 추위와 강풍, 눈바람이 불어닥쳤으니 꽃들이라고 멀쩡한 리가 있나. 다들 얼어서 꽃잎조차 까맣게 죽어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물론 붉은 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꽃들도 있지만, 아니 그래도 풍성하게 나무 한그루에 가득히 점점이 박히 붉은빛들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귀포까지 멀리 온 목적을 상실하고, 근처의 휴애리까지 한번 입구까지만 갔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의 여행 4일차, 다른 일행들 3일차, 실패.


 아직 오늘까지도 눈은 계속 쌓이고 있다. 휴애리 입구에도 발목까지 눈이 쌓여있어 걸음을 떼기 쉽지 않다. 휴애리도 실패. 그래서 서귀포 옆의 해안 카페에서 다른 일행들을 한참 기다리며 우리는 아이를 봤다. 

 

 마침 일행중에 아침에 커피를 함께 마시러 나간 형님은 네이버에서 꽤나 방문자 수가 높은 파워블로거인데, 그래서 이리 저리 눈이 오는 와중에도 나름 바삐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우리끼리였다면 그냥 방에서 누워서 아이나 봤을 텐데, 정방폭포며 세연교며, 알차게 그래도 덕분에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일행을 위한 저녁 상을 차렸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 숙소 바로 앞 순대공장에서 사 온 순대와 족발을 물에 데운뒤, 부추를 대쳐낸다. 백김치를 곁들여, 막걸리와 맥주와 함께. 


 제주도에서 첫 주말이 깊어간다. 벌써 4일차, 내내 바쁘게 사람들과 놀았구나. 그런데 다음주엔 또 다른 친구부부, 그리고 그 주 주말엔 우리 부모님이 오신다. 이게 뭐 휴가인가 싶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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