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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04. 2023

진지전

이를 악물고 견디는 밤

 항우와 유방의 초한대전의 한 장면, 팽성대전에서 유방의 56만 대군은 항우의 3만 정예군에 의해 완전히 개박살이 난다. 유방은 파촉에서 탈출해 한중을 점령한 뒤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까지 점령한 상태였고, 다른 여러 나라의 제후까지 항우에게서 등을 돌리고 유방에게 붙은 상태였다. 56만 대 3만, 상상하기 어려운 격차였고, 상식 밖의 결과로, 56만의 대군 중 30만명 이상이 몰살 당했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정예 중 정예만 추려낸 항우의 군사에 비해 유방의 대군은 각지의 제후들이 모여 지휘체계도 전술도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병가의 상식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혼란에 빠진 유방군은 자멸했다. 


지난 대선을 생각해보자면, 민주진보 진영은 분열되어 있었고 윤석열과 국민의당 진영은 똘똘 뭉쳐있었다. 사법개혁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에 의해 자극받은 법관들은 하나같이 우르르 반민주당 진영으로 기울어졌다. 사법권력의 한 축인 검찰의 총수는 아예 보수당에 입당해서 얼굴마담이 되었다. 안철수라는 회색지대의 정치인도 끝내 보수정당에 투신해버렸다. 반면 민주진보진영은 우선 정의당이 5년 내내 이를 갈아대며 민주당을 적대시했다. 여기에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이념공세가 더해져 민주당의 정치적 입지를 줄였다. 혼란스러운 전선 속에서 전통적으로 기득권에 반하는 정치적 선택을 해 온 젊은층 남성이 보수 기득권 세력을 지지하는 선택을 했다. 보수정당은 단결했고, 민주진영은 분열한 상태에서 대선이 치러졌으니, 이기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안철수 세력과 정의당 계는 각각의 진영에서 그들을 합치면 유리해지고, 갈라서면 불리해지는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22년의 이상한 패배에,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지난날의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일부 정치 주체들의 선택의 문제였을 뿐이다. 안철수가 윤석열 편을 들지 않았다면, 혹은 정의당이 그래도 검찰제국을 만들어줄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면, 지금 세상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겠지. 세상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때론 보이고, 때로는 또 말도 안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이기도 한다. 보다 큰 틀에서 사고를 하고, 보다 가치로운 결단을 하고...역사는, 물론 아주 큰 시간 단위에서는 발전하는 방향으로 흘러왔지만, 실제로 그 과정은 무수한 불의와 악의들로 범벅되어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유방의 군세에 섰다가 항우의 칼에 휩쓸려나간 이들에게 죄는 있을까. 그저, 우리사회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온 우리가, 잘못이 있을까. 


 내가 틀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근거를 찾아 엮으면서, 그 "이기는 쪽"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조금 난감하다. 기이한 패배를 지켜보며, 내가 잘못이 없다면 저쪽에 선 사람도,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긴 어렵겠지. 그저 우리는, 각자의 진지에 나란히 서서 저 먼 암흑을 바라보며, 숨을 죽이는 한사람 한사람일 뿐. 끝나지 않을 이 전쟁 속에서 내 발이 진창에 불어터 얼어붙을지라도, 생쥐들에 의해 내 살이 갉아먹힐지라도 견디고 또 겪어내는 것 외엔 길은 없다. 각자가 갇혀 있는 진지가 하나씩 무너질 때마다 전선은 수십 수백미터가 뒤로 밀릴 것이다. 저기, 군대를 불리고 또 불려 거만하고 횡포한 군세에. 


 진지에 갇혀, 하나의 포성을 본다. 하나의 비명, 새벽처럼 밝은 화염의 열기. 적은 또 한차례 폭격을 퍼부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명제처럼, 하나가 되어 법이란 이름의 칼날을 휘두른다. 우리는 진지에 갇혀, 그것을 바라보며 몸을 떨 뿐, 나아가면 총알 세례다. 물러서면 전선이 붕괴한다. 이 자리에 그저 서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덮쳐오는 종말의 공포를 실감하면서, 우리의 분열된 진영을, 그리고 길고 긴 겨울을 바라본다. 다른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침묵의 시간, 무감각한 인내의 시간. 그러나, 달아나면 붕괴한다. 내가 달아나지 않는 것은 이 진영이 모두를 살리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 고통에 눈을 돌리지 못한 채로.


 하나로 뭉친 언론과 정치, 사법과 경제 권력. 그리고 분열하고 갈라진 오합지졸과 같은 민주진영의 상태에서, 또 하나의 판결이 나왔고, 성큼성큼 그들은 하나의 전선을 무너트리며 깊숙히 우리의 진지 한 가운데를 횡단하듯 찔러온다. 조국과 문재인 이재명, 그리고 또 누구 누구. 검찰이 노리는 하나 하나마다 재판부는 굴종하듯 판결을 하고, 그렇게 사법이익공동체는 사법개혁의 보복이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는 것처럼, 개혁을 말하는 이들을 씨를 말려버리리라는듯이 법봉을 두드린다. 그런 그들에게, 사람들의 촛불이며 무슨 별명이며가 무슨 상관일까. 그냥 기소하고 파탄을 내버리면 그만일 일이다. 


 아직은 어둠이다. 진지 속은 진창이다. 진지 밖은 죽음이, 참호에는 절망이 늘어서 있다. 살기 위하여 나는 진지 속에서 눈앞의 군대를 노려볼 뿐이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이 전선이 지켜질 수 있다 믿으며.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살아있는 것 뿐이다. 다만 나는 우리가 목도한 사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또 법은 그 빛을 상실했다. 싸움에서 이기기 이해서라도, 이 장면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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