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육회 메뉴들
여느 관광지와 비슷하게 해가 저물면 제주도는 갈만한 식당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특히 제주시나 서귀포시를 벗어나면 각 읍 면 단위에는 고기집 정도를 제외하고는 외지인 입장에서 선뜻 찾아가기 어렵다. 대부분 7시반, 조금 인기 있는 곳은 그 전에 마감을 하며 그 밖의 집들은 검색을 통해 방문을 결정하기는 어렵다.
월요일에 나는 혼자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와 아기가 아침 9시부터 밤 8시까지 아빠를 기다렸고, 내가 7시쯤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아내는 제주시에 있는 김밥집에서 포장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마감 시간인 7시반이 되지 않았는데도 그 김밥집은 이미 마감 상태. 왕복 25분 거리를 헛걸음을 하고, 내 마음은 급해졌다. 우리 한달살이 숙박지인 애월에 도착하면 8시를 넘긴 시간. 먹을 곳이 없다. 빗길을 초조하게 달리면서 저녁 먹을 곳을 찾기는 어렵고, 결국 그날은 오징어짬뽕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뭐, 라면이라고 해서 나쁜 저녁식사는 아니었다. 하나로마트에서 두 마리 만원이나 하는 오징어를 사와서 손님대접을 했었는데, 남은 반마리를 넣어서 정말로 오징어 오징어짬뽕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다음날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시간은 어느덧 일곱시를 향해가는데 저녁 먹을 곳을 정하지 못했다. 모처럼 날씨가 괜찮아서 휴애리를 다녀왔는데, 서귀포시에서 저녁을 먹으려던 곳이, 하필 그날 휴일. 가게 앞까지 가서 헛걸음을 쳤다. 그런 다음에 오는정김밥에 가서 취소 난 것 있는지 물어봤는데 역시 실패. 마침 이때쯤, 아이의 잠투정이 터졌다. 그럴만도 하지 서귀포시까지 내려와서 코스를 도는 동안 제대로 낮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불안해진 나는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해보자고 차를 몰았다. 아이는 한 20분 가까이 잠투정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8시가 다 되는 시간에, 애월의 몇 안되는 야간까지 하는 밥집, 보보애월에 도착했다.
나는 식당을 찾을 때 일단 지도 앱으로 내가 있는 곳을 크게 확대해서 식당이나 카페 마크가 있는 모든 곳을 다 눌러본다. 검색으로 잡히지 않는 괜찮은 식당들을 찾을 수 있다. 보보애월의 경우 2022년 6월에 오픈해, 현재까지 8개월여 된 가게다. 누적된 방문자 평이나 검색에 쉽게 잡히는 곳은 아니다. 위치도 애월의 관광객들이 몰리는 카페거리 상권에서 멀찍이 떨어져있다. 나도 이번에 제주도 와서 초기에 애월 주변 식당들을 싹 스캔하면서 한번 확인을 해보곤, 육회를 주력으로 하는 메뉴에 딱히 당기지 않아서 즐겨찾기를 해두지 않고 스킵했던 곳.
그러나 오늘은 조금 사정이 달라져 있다. 어제도 저녁이 라면이었다. 오늘 하루는 제법 길었다. 저녁만이라도 잘 챙겨먹고 들어가야 마음이 넉넉한 상태로, 집에 돌아가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두시간의 추가 일과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또, 나는 아내의 까다로운 식당 선택을 알기 때문에 전에 보보애월을 공유만 하고 딱히 가자고 이야기하진 않았는데, 오늘은 아내의 입장에서도 8시 이후까지 영업을 하는 밥집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지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육회비빔밥이라니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제법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가게에 들어가, 육회비빔밥과 비빕국수 하나씩을 시켰다. 반반세트를 시킬까도 이야기해보았으나 간단히 먹고 들어가자는 아내의 대답. 그 결과는,
야, 이거 로또 당첨된 기분이다. 13000원짜리 육회비빔밥과 비빕국수에서, 한우는 ++등급이고 그 양도 넉넉하다. 사진으로 보면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애호박전과 사이즈를 비교해보면 대강 짐작이 된다. 큰 옛날 짬뽕국물 사이즈의 사기그릇에 넉넉하게 음식이 담겨나온다. 채소가 풍성할 뿐더러 아삭이는 배추의 식감이 비빔밥이든 비빔국수든 육회와 맞춤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마감시간이어서 그런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비빔밥에 딸려온 미역국에는 고기가 상당히 들어가 있고(역시 미역국 그릇을 보고 육회그릇의 사이즈를 짐작할 수 있다.) 육회 외에도 넉넉하게 들어간 고명이 특히 만족스럽다. 비빔국수엔 주먹밥이 딸려나와 아기를 위해 공기밥을 주문한 것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차림새까지 만족.
아이가 잠에 취해있다가 음식이 나오니 꾸물꾸물 입을 벌리기 시작하는데, 요즘 들어 미역을 잘 먹는다. 아빠가 미역국 잘 끓인다는 소문을 뱃속에서부터 듣기라도 한 것인지. 한우 미역국이라 흰 쌀밥을 말아서 아이의 입에 훌훌 넣어주며 고기 씹기를 연습시킨다.
이제 아기는 많은 것을 자기 입으로 씹을 수 있다. 부드러운 쇠고기 미역국이라면 더 할 나위 없지. 숟가락으로 국과 밥알을 떠먹어보지만, 국물이 아빠의 허벅지에 뚝뚝 떨어진다. 고기는 어색하며 반절은 씹다가 내뱉는다. 그럼에도 열심히 작은 입을 움직인다. 부들부들한 미역을 그리 좋아한다.
아이를 밥을 먹이려니 어딜 가도 반공기 분량의 밥을 바닥에 흘리곤 하는데, 사장님은 그런 우리 가족에게 눈총을 주긴 커녕 주방에서 마감을 하시던 중에 나와서 아이를 보고 얼러주고 가신다. 친절하시기까지.
맛집이란 잘 되길 바라면서도 또, 너무 잘되지 않길 은근히 바라게 된다. 또 오고 싶은데 너무 바빠서 우리가 못들어오면, 조금 아쉽잖아. 게다가 이 가격에 이런 수준의 음식을, 이런 친절과 함꼐 맛볼 수 있다니. 그것도, 밤 7시반이 넘은 제주도에서.
그날은 바쁜 하루였다. 우리는 제주도 중산간을 어지러이 누비다가 휴애리에서 노을을 맞았고, 아이를 위한 성장의 양분을 많이 채워넣었다. 그 댓가로 우리의 몸은 적지 않이 지쳐있었다. 아이 역시도 지쳐 우리의 저녁 식사를 조금 고민케했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아내는 또 하나의 제주도에서 추억을 혀와 마음에 담았고, 나는 가족의 저녁 한끼, 만족스럽게 선택했다는 보람을 느끼고 집에 와...아이를 씻기고...아이를 재우고...왜 안자니...하다가...아이와 함께 밤 열시에...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