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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29. 2023

그래요 나예요 내가 했다구요

첫 소풍 첫 도시락

 자기가 좀 하지. 


 난데없이 날아온 바깥양반의 톡에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은 이유식 기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바깥양반과 나 사이의 갈등. 아이의 밥과 엄마손맛이라는 문제. 

 

 물론 나는 가만히 냅둬도 알아서 오늘의 요리를 착착 만들고 아기 밥도 알아서 챙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깥양반의 이런 요청에 조금도 놀랍거나 귀찮음을 느끼지 않는다. 20개월 아기가 도시락을 싸줘봐야 얼마나 먹겠는가. 아침 30분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아직 한번도 바깥양반은 자기 손으로 이유식이든 뭐든 만들어준 적이 없다. 그것이 요즘의 아이 키우는 트렌드다. 이유식, 아이음식을 시기별로 수십가지 선택지를 주고 사먹일 수 있게 해놓고 있다. 그래서 바깥양반은 내가 이유식을 해놓으면 따로 자기가 종류별로 몇가지 사서는 아이에게 식단을 꾸려주었다. 물론 그것은 당시 대학원 공부로 매우 매우 바쁜 삶을 살던 나에게 큰 도움은 되었다. 그러니까, 바깥양반의 이런 방식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효율성의 문제일 따름이다. 아이와 엄마의 관계와 유대를 고려할 때, 아이가 한 평생 아빠가 한 밥만 먹고 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아이가 온전히 자라기 위해선 엄마의 손맛에 대한 평생에 걸친 기억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이제 아이가 많이 자라, 우리가 먹는 밥에 그냥 잘게 찟은 장조림에 물에 씻어 잘게 자른 백김치만 있으면 되는 시기인지라, 그것이 힘들 일도 아니다. 이럴 때 좀 지가 하면 어때. 도시락을 싸는 동안 옆에서 내가 이리 저리 알려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건 그냥 내 생각이고. 바같양반은 도시락통을 샀다. 그리고 나는, 언젠간 만들겠다는 그 말을 듣곤, 내가 만든다. 우선 전날 밤에 간 쇠고기로 주먹밥 고명. 

 우리가 먹을 거라면 마늘을 빻아서 넣었을 테지만, 아이가 먹을 거라 간장으로 살짝, 그리고 들기름으로 피니시했다. 이걸로 떡국이나 끓여먹으면 되겠구만. 설날 때 또 받은 가래떡이 아직 한참이다. 고명은 넉넉하니 이걸로 아이의 주먹밥을 만들기로한다. 


 다만, 동백이는 요즘 주먹밥이나 스프 류보다는 오로지 흰쌀밥을 즐겨서 조금은 고민이다. 여러가지 먹이고 싶은 마음, 그러면서도 내가 부재중일 때 바깥양반이나 장모님이 아이 밥을 잘 챙겨주시기 바라는 마음에 내가 미리 만들어두면, 그걸 아이가 썩 잘 먹어주지 않는다. 대신 맨밥은 잘만 먹는다. 그래서 요즘은 잔멸치로 멸치볶음과 장조림을 해두니 제법 먹는다. 

 그리고 수박. 수박은 아이가 참 좋아라 한다. 그래서 밥 반 공기 정도 분량 수박을 아침에 먹인다. 그렇게 하니 섬유질에 부족해 된똥이 나오던 아이도 요즘은 응가를 아주 편하게 한다. 두루 두루, 과일은 건강에 좋다. 


 채소와 과일을 여러가지 먹일 수 있게 된 요 시기가 오기 전까지엔 아이가 똥이 딱딱하게 굳어서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이는 변을 볼때마다 힘을 주었고, 그러고도 염소똥 같은 똥만 하루에 두번 세번, 장이 막혀서 억지로 나오던 때가 있었다. 하필 그게 또 과일이 많이 나오지 않는 겨울철이었던 것이라, 딸기만 주구장창 사먹였다. 그런데 딸기론 섬유질 보충이 많이 안되는 가봐. 별 도움이 안되다가, 확실히 수박철도 되고, 그 전에 예산에서 사온 사과도 먹이니 이제는 황금색 예쁜 똥이 아주 푸짐하게도 나온다. 

 멜론까지 해서 두개의 반찬통은 끝났다. 그런데 아이코야 멜론 오랜만에 사보니, 왜 이렇게 수율이 수박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으냐. 굳이 구색을 갖춘다고 메론을 샀다. 아이가 사과를 잘 먹으니 그냥 사과 하나, 수박 하나로 딱 마쳐주었어도 될 일인데 말이다. 멜론을 입맞에 맞아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바깥양반이나 나나 고민 끝에 산 녀석이다. 그런데 멜론이라면 응당 그렇지만 등치는 볼링공만한 게, 막상 달달한 건 사과 한 알 만큼이 나올까 말까. 차라리 참외가 낫지!


 이제, 주먹밥을 만들 차례다. 새로 지은 밥에 고명을 넉넉하게 넣고, 다시 기름을 조금, 그리고 착착 모양을 잡아서 통에 넣는다. 


 요즘 아이가 먹성이 퍽 좋아졌다. 변덕이 심해, 자기 입에 맞지 않으면 기미만 보시고 고개를 돌리곤 하지만, 또 아빠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먹을 바에는 반찬도 없이 흰밥만들 퍽퍽 손으로 퍼먹긴 하지만, 그러나 일단은 먹성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백김치에 맛을 들엿다는 것이다. 아이 어린이집에서 김치와 나물을 잘 먹는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해, 이번에 도시락에도 싸주기로 했는데, 이때쯤 동백이가 깨어났다. 도시락을 싸기 위해 헹구던 백김치를 조금 아이에게 내주니, 어허라 잘 먹는다. 신기하네.


 나는 원래 백김치를 굉장히 좋아하는지라 아이가 이런 식성을 보이니 반갑다. 작년엔 아이 덕분에 외출과 외박이 적어서 김장김치가 9월쯤에 쫑이 났었는데, 올해는 아직 백김치도, 김장김치도 제법 남아있다. 아직 김장까지 6개월이나 남았으니 방심은 금물, 이겠지만은. 아이가 더 크면, 아이와 백김치도, 오이소박이도, 열무김치도 함께 먹을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엄마가 건강하신 동안에야 그 김치를 맛나게 먹겠지만, 엄마가 더 김치를 하실 수 없게 되면, 내가 하루 날짜를 올인해서 누나네와 같이 김장을 해야겠지.

 그런데 지단이, 조금 실패. 어하라...하필이면, 저기, 접힌 부분이 딱. 모양을 잡아놓고 보니까 마치...얼굴에 길게 흉터가 난 아기 상어 같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왜 나는 지단을 한번에 딱! 뒤집지 못했는가. 원래는 좀 더 넓게 펴졌어야 할 지단이, 뒤집는 과정에서 이쿵! 하더니만, 반절이 되더니, 그걸로 이리 저리 모양을 잡고 아기상어를 만들다보니...이렇게 되었다.


 그래요. 내가 했습니다. 내가 그랬다구요!


 ...하아. 어쩔 수 없다 모양은 잡았으니, 흰 계란지단보단 이왕이면 아이가 좋아하는 치즈로 입을 만들고, 아까 아이 도시락을 싸고 남은 수박을 토토톡, 하고 잘라서 입과 이를 만든다. 완성!

 상어 지단을, 주먹밥 위에 올린다. 그리고 헹궈낸 백김치를 올린다. 완성. 완성. 완성. 도시락통이 퍽 예쁘다. 내가 어릴 때 저런 도시락통을 들고 다녔으면 얼마나 재미났을까. 그런데 이렇게 예쁜 도시락통에 아기상어라니. 흐음. 괜찮은가. 나쁘지 않은가. 아빠는, 과연 솜씨를 보여주었는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음- 아빠가 누구 보라고 실력을 발휘했는지가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딸은 소풍 가서 즐거웠을까. 잘 먹었을까.


...소풍 사진을 보니, 피부가 쌔까만게, 영농후계자랑 잘 어울려보인다고 생각하는, 농사 짓던 집안의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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