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해.
생일 파티를 꿈꿔본 적이 있다. 집에서 긴 상에 음식을 늘어놓고, 나는 맨 상석에 앉아 고깔모자를 쓰고, 엄마는 속속 음식을 날라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는. 그러나 어린시절 내가 살던 단칸방 우리집에 친구는 한명도 불러보지 못했다. 비싼 돈을 들여 과자파티라도 하는 그런 기쁨에, 부모님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부모님의 관심과 격려는 반장을 도맡아서 하던 누나에게로 쏠려있었다. 말더듬이에 행동도 어수룩하던 나는 누나의 치맛자락이나 졸졸 잡고 따라다닐 뿐이었고 따라서, 부모님이 비싼 돈을 들여 생일 파티를 해준다면 그것은 당연히 누나의 호사였다. 스카우트 아람단 유니폼을 입어본 것도, 자기 책상을 가져본 것도 오로지 누나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누나와의 비교도 금새 의미는 없어졌다. 부모님의 서점이 어려워지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거의 매년 이사를 다녔다. 둔산동의 아파트로 간지 1년만에 다시 집을 빼서 사업자금을 충당했고, 급하게 구한 집들에서 다시 한번 이사를 갔더니 거기선 법원의 경매 처분 통지를 알리는 빨간 딱지가 여기 저기 붙었다. 열 두살에 소년은, 세상이 한번 무너졌다. 우리는 거의 모든 걸 잃고 옷가지만 챙겨 서울로 도망쳐왔다.
서울에서, 내가 기다리던 생일파티를, 마침내 가보았다. 서울에 올라와 사귄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동그란 얼굴에 키는 나만큼이나 컸고 넉살이 좋고 유순한 아이였다. 그 친구는 날 마음에 들어해 자기 집에도 몇번 불러서 같이 동방불패 비디오도 보고, 어머니에게 소개를 시켜주기도 했다. 도시가 형성된 역사 자체가 짧은 대전과 서울은 뭐가 달라도 달랐던지, 나는 그 친구의 생일에, 당시 은평구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던 불광동 롯데리아로 함께 초대받았다. 대단한 건 없었다. 나는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 섞여 햄버거 세트를 얻어먹고는, 알아서 혼자 집으로 왔다. 그 친구는 알아서 생일 파티를 정리하곤 또 따로 알아서 집으로 갔다. 케익도 없고 고깔모자도 없어서, 퍽 시시했다.
열세살의 초등학교 마지막 생일무렵 엄마는 나에게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생일이니 얼마라도 용돈을 주시고, 또 어디서라도 받겠거니 하셨을 것이고, 그와 동시에 아직 초등학생인 어린 아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저축이다 생각하셨을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주5일제가 있기 전 어느 토요일, 생일이 오기 몇일 전에 더운 여름 햇살을 맞으며 거리에 나왔다.
에어컨이란 낯선 물건이 날 달래주던 은행에서의 시간은 10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은행엔 단 돈 5천원이 찍혀있었다. 그게 내 수중에 있던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진작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왜 생일에 내가 축하를 받아야 하지?
그러니까 그 질문은, 불현듯 내게 찾아왔다. 열세살 생일을 맞도록 내가 축하받을만한 어떤 일을 한 것이 있지? 생일에 기념될 것은 나의, 그리 티도 나지 않는 한 살 더 먹은 나이인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날 낳고 기른다고 애쓰시는 부모님들의 노고일까.
마침 그때 엄마는 뼈아픈 상실을 겪고 있었다. 엄마의 취미인 화분 모으기가 몇차례 이사를 하며 차츰 차츰 쇠잔해지더니, 마침내는 옷가지만 걸치고 서울로 도망을 오느라 그 많던 화분을 다 처분하고, 단 하나의 화분도 곁에 두지 못하고 계셨다. 중학생이 된 누나는 한창 예민한 시기를 상처와 원한 가득하게 보냈다. 아버지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몸을 혹사시키고 계셨다. 다행히고 아직 어린 아이였던 나는, 그럭저럭 세상이 견딜만은 했다. 오로지 나만이 당시의 우리 가족 중에서는 안온하게, 별일 없이, 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나만. 다른 가족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서.
나는 마음먹은 일을 하기로 했다. 은행에 가지고 갔다가 넣지 않은 남은 한장의 오천원 지폐를 꽉 쥐고 은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잔뜩 늘어서 있던 비닐하우스 분재집들 중 하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만만해보이는 화분을 하나 골랐다. 철쭉같은 꽃이 피어있는, 4천원짜리 분재. 당시 짜장면 가격이 2천원이 될까말까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만원의 거금이다. 나에겐 큰 돈이었다.
그 화분을 들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마음은 그리 기쁘고 보람차지 않았다. 이 화분 하나로 무너진 우리의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았던 편이라, 만화책을 사는 것 말곤 다르게 내가 탐낼 일도 없는 돈이다. 엄마는 밤 늦게 이모의 가게에서 일을 마친 뒤에 돌아와 화분을 보시게 될 것이고, 엄마 역시 기쁨을 제대로 표현하실 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뭔가 색다른 일을 하나 했다는 정도의 생각.
그로부터 한 두 해 정도는 엄마에게 화분을 내 생일마다 선물해드렸다. 그러나 내가 학원을 다녀야 하게 되고, 매주 3천원의 용돈으로 만화책을 한권씩 사모으는 일이 이어지면서 생일에 맞추어 엄마에게 화분을 사드리는 일은 길게 유지되지 않았다. 나도 중학생이 되고 욕심이라는 게 생겼으니까. 대신, 다른 효도의 방편으로 그래도 공부를 조금 빡세게 하긴 했다. 무너진 우리의 세상이 복원되기까지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다. 그 사이에도 우리 가족은 서로를 무수히 상처입히면서 끝까지 함께 데굴데굴 굴러 경사가 완만해지는 지점까지 하산해 내려왔다.
엄마는 그 일에 대해 꾹 입을 닫고 사시더니 최근 그 이야기를 몇번 연달아 꺼내셨다. 생각해보면 겨우 그 정도 일이다. 자기 생일이라고 엄마에게 화분을 선물했단 건. 내내 가슴에 담아둘 일도, 매년 생일마다 리마인드 해줄 일도 아니다. 어느새 아들은 장성해 손녀를 안겨드렸고, 엄마에겐, 내 아들이 이렇게 훌쩍 컸구나 실감이 나실 그런 시기. 나는 잊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의 연로해져가는 목소리와 용모에 자연히 두 분과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도 않았음을 예감한다. 젊은 시절을 그저 희생으로 살아내신, 마치, 생일 파티 같은 것이 없던 나의 어린 시절처럼, 고통과 슬픔마저 무감각했을 시간.
다행히 엄마는 세상 누구 못지않은 다육이 부자가 되어계시다. 내가 화분을 사드릴 일이 필요치 않을 만큼. 나는, 하아. 아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선, 할 일이 너무나 많이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