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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07. 2023

첫 해외여행에서, 말문이 트이다.

22개월에 물이라고 처음 말하다니.

"너희가 너무 애를 끼고 키우면서 떠먹여주고 가져다주고 해서 그래."


 나는 원체 늦된 아이라서 우리 따님께서 일부 성장발달이 더디 나타나는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편이다. 유아기 아이의 성장발달 경과나 특성은 대부분의 경우 그냥 랜덤 주사위 놀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 좋은 유전자를 아이에게 깔아준다 한들, 아이가 몸이 약하게 태어나거나 유아기의 사소한 어떤 변화 하나면, 신생아기부터 부모의 마음에 비상벨이 울리기 십상이다. 늦게 걷는 아이, 밥을 먹지 않는 아이, 잘 울고 신경이 과민한 아이 등등. 우리 아이는, 말이 좀 늦다. 아이를 길러본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아이가 말이 늦는 것에 대해, 부모가 너무 아이를 열심히 챙겨서라고, 위와 같이 이야기를 한다.


 너무 끼고 키우면, 아이가 말이 늦는 걸까? 대부분의 속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는 근거 없는 예단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가 아이를 끼고 키운 것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아이는 유당불내증으로 인해 배앓이를 좀 많이 했다. 배앓이도 시기를 타는것이라, 한두번 정도 다른 분유를 시도해보다가도 영 아이가 변화가 없어서 이러다 말겠지 하며 포기상태였고, 6주차쯤에야 전문가의 조언으로 락토프리 제품으로 바꾸면서 배앓이가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배가 늘 아프던 아이는 엄마나 아빠의 품이 아니면 마음을 놓지 못했다. 아내는 아이의 신생아 시기에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하루를 꼬박 보냈다. 나는 집에 와서 몇시간씩 꼬박 아이를 안았다.


 배앓이라는 문제, 몇가지 시도와 포기, 부모의 품에서만 마음을 좀 놓던 아이라는 문제가 겹쳐 이후로도 좀 아이를 끼고 사는 육아가 이루어진 것 뿐이지, 그 뒤에야 딱히 아이의 자발성이나 주체성을 깎아낼만한 육아는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아이의 행동과 노력을 고무했다. 아이는 남들보다 3개월은 빨리 첫니가 났고, 남들보다 반년은 빨리 모든 이가 다 났다. 11개월부터 걷기 시작했고, 이미 그 전에 고함을 치며 자기의 의사 표현을 확고히 했다. 늦될 이유가 보이지 않는 평범한, 랜덤한 발달상에 말 대신에 검지 손가락으로 지시를 하며 자기의 거의 모든 요구사항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15개월쯤부터는 "이거"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아이는 딱히 직접 개별 어휘를 쓰지 않아도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22개월이 되기 직전인 치앙마이에서의 3일째쯤,


"무울-."

"응? 동백이 물이라고 했어?"


 아이의 말문이 터졌다. 그것도 완전히 뜬금포로.


"무울 무울 무울 무울 물-."


 슬슬 조짐이 있었다. 인지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이거야? 아니야."를 수십번 반복하며 외던 모습이 한 2,3주. 그러다가 이 날은, 아침을 먹고 외출할 채비를 하는데 갑자기 물을 달라고 말을 한 것이다. 딱히 아이에게 물이라고 더 가르친 것은 아닌데도, 조금 뜬금없이.


이게 해외여행의 덕일진 모르겠다. 다만 방학을 하고 엄마 아빠와 우리 딸 셋이 완전체가 되어 활동을 하면서 조금 더 아이에게 다양한 자극이 주어진 것은 확실하다. 아이는 단조롭던 어린이집과 집의 쳇바퀴에서 이제 엄마 아빠 사이에 꼭 붙어 평소보다 많은 대화를 관찰했다. 매번의 여행이 거의 그렇다. 특히 치앙마이, 태국의 경우도 식당에서 물을 무료로 주는 경우가 없어 우리는 어제 하루 "물"을 조금 더 많이 외쳤다. 아침에 아기에게 물, 조식을 먹은 뒤 생수병에 물, 가방을 챙기며 가방에 물, 식당에서 물, 카페에서 물, 물물물.


 22개월의 문턱에서 이제,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아침을 물로 시작하더니 하루 종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여러가지 말을 시도한다. 옹알이에서 유아기 언어 발달로 넘어가는 도상의, 그 다양한 발음들. 어쩌다 "시러!"라고 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놀라서 내가 한번 더 해보라니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아이는, 길 어디에나 꽃이 만발한 치앙마이의 여름 속을 거닐며, 나에게 "꼬옷-."을 여러번 말한다. 나는 어김없이 아이에게 길가의 꽃을 꺾어 아이의 고사리 손에 쥐어준다.


 꽃을 부를 수 있는 아이가 된 것은 사뭇 감동적인 일이다. 생긴 건 피부도 시커멓고, 눈썹도 시커멓고, 머리카락도 시커먼 게 여자아이인 티는 내고 싶은지. 꽃만 보면 꺾어달라 야단이다. 막상 자기는 꽃을 꺾으려고 다가가다가도 손을 뻗지 못한다. 랜덤한 발달상. 랜덤한 돌발행동들.


 그러고보니, 치앙마이의 날씨도 랜덤이다. 이토록 화창하던 날씨가 점심을 먹고 숙소로 아이의 낮잠을 위해 돌아오니 소나기가 내린다. 아내는 아이를 재우는 동안 오일마사지를 받고 왔는데, 에어컨이 과하게 차갑게 틀어져 있는데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 에어컨의 온도를 충분히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아내는 급 감기가 걸려 오후를 공쳤다. 우리는 전자렌지도 없이 뜨거운 물에 햇반을 데우고, 캐리어에 싸온 육개장 컵라면 두개에 물을 부어, 캐리어를 밥상 삼아 저녁을 먹었다. 아이는 진작부터 잘 써먹던 맘마란 말을 신나게 떠들며 햇반 하나를 다 비웠다. 아내는 기침으로, 나는 업무로 밤에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이날 간 곳

https://blog.naver.com/yunsunning/22317425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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