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순 Apr 24. 2020

지나간 세월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네요

생일날 

 산중의 달력은 머무름이 긴 거처럼 느껴진다. 산속처럼 청초했던 그때의 시간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더디 간다고 빨리 좀 가기를 원했다. 흐를 거 같지 않았던 세월은 항상 내 옆에서 너그러운 표정으로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 주는 줄 알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인연은 당연하게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근거 없는 약속의 도장이나 받아 놓은 듯이 확신했다. 인연은 떠나갔다. 시간은 저쪽으로 이쪽으로 우리를 갈라놓았다. 이젠 서로가 만날 수 없게 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는 육교 밑에 서 있는 거 같다. 만날 수도 없고, 보고 싶어도 건너갈 수가 없다. 그냥 그리워만 할 뿐, 아쉽지만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세월은 새로운 호칭을 선물한다. 할머니.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기다린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할머니를 부르며 따라가는 꼬마의 뒷모습을 본다. 9월이면 나에게도 정확하게 할머니라고 불러줄 아이가 태어난다. 인생에서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그가 너무도 궁금하다. 눈도 빛나는 눈빛도, 하얄 것 만 같은 피부 색깔도, 오뚝할 것을 확신하는 콧날도, 입술 모양도, 커가면서 가지런하게 꽃처럼 피어나는 하얀 치아를 상상한다. 까르르 웃음을 던져주는 볼 살이 통통한 아이가 떠오른다. 유아기 때의 귀여움, 미운 일곱 살을 개구쟁이로 보내고, 청소년기의 약간은 짓궂고도  얄미운 모습, 훤칠하고 늠름한 매력을 지닌 청년의 모습을 떠올린다. 너무나 마음이 커져있어서 유혹당하고 싶은 남자의 팔짱을 끼고 서있는 아름다운 할머니를 상상한다. 그 할머니는 남자의 얼굴에서 젊은날의 남편의 모습을 찾아가며 대견해서 웃고 있을 것이다.

     

어제의 등산 때문인지 밤사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머리 위엔 까치집이 근사하게 지어있다. 희끗희끗 빛바랜 누리끼리한 머리카락은 검게 염색할 날짜가 지나갔음을 알려준다. 얼기설기 두 채나 되는 까치집을 무너뜨리며 베란다로 나간다. 버티컬을 들어 올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햇살은 넓은 거실에 보석상을 차린다. 반짝인다. 깨끗하고 맑은 날이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내 생일. 세월이 맺어준 며느리의 축하 전화 목소리로 저녁 식사 약속을 받는다.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간다. 발밑에서 이름 모를 하얗고 노랗고 보랏빛 작은 풀꽃들이 내 발을 요리조리 잘도 피한다. 해마다 봄이면 예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이름도 기억해 주지 못하는 성의 없는 얄미운 여인을 그들은 아마도 섭섭해할 거 같다. 작은 꽃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몸은 가냘프지만 후덕한 마음을 지닌 꽃들은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발끝에 서있다. 꽃향기는 빠르게 내 코를 지나 마음까지 적신다. 입고 있는 니트 티셔츠 솔기 사이로 봄이 배어든다. 봄의 단아함을 눈동자에 담는다. 해묵은 초록의 빛깔을 무겁게 걸치고 있는 짙은 소나무들. 게을러 보인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하늘을 가리키는 가지 끝에서 희미한 연두가 돋아난다. 

'그래 그렇지, 너도 새 옷으로 갈아입는구나.'

 건강함이 솟아난다.

     

약속한 식당으로 간다. 큰아이 내외가 먼저 와있다. 작은 아들까지 우리 다섯 식구들은 모두 모였다. 꽃다발을 내민다. 정서가 메말라서인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아프게 잘라져 있는 꽃을 사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뿌리 없이 연명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했는지 “엄마, 꽃 속을 자세히 보세요.” 요즘 유행하는 돈다발이다. 카네이션 꽃송이를 신사임당 여섯 장으로 감싸 놓았다. 며칠 후면 다가올 어버이날의 선물은 기대하지 말라는 뜻인지 카네이션 꽃으로 준비했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꽃향기에 돈 냄새가 합쳐지니 새로운 향기로움이다. 익숙해지고 싶은 냄새, 자주 기억하고 싶은 내음. 난 , “경제의 향기”라고 이름 붙인다. 내년에도 짙은 “경제의 향기”를 약속받는다.

     



돌아오는 길. 거리의 자동차들은 들고 있는 꽃다발이 궁금한가 보다.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쳐다본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서운한 것만은 아니었다. 작았던 아이들은 몸도 마음도 나보다 ,더 커다랗게 변해있었다. 세월의 덕이었다. 세 아이들이 양팔을 감싸준다. 9월이면 할머니의 세계에 도전한다. 태어날 아기를 상상하니 잠시 숨이 멎을 거 같다. 행복이다. 한 발 뒤에 남편이 걸어온다. 

“지나간 세월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네요.” 






작가의 이전글 노란 장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