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성적표는 몇 등급 나오세요?

느리게 달려도 괜찮아, 인생도 러닝도

by 커피맥주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해마다 다른 색깔의 학생들이 찾아오지만, 요즘 들어 유독 자주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퀴즈 점수 몇 점이 낮았다는 이유로 마음이 조급해지고, 출석 하나로 흐트러진 평균에 스스로를 책망한다. 그 작은 흠 하나가 앞으로의 삶에 큰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조차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연구실의 대학원생들도 마찬가지다. 실험이라는 게 원래 다그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열 번 중 아홉 번은 실패가 당연한 일인데도,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면 마치 세상에 뒤처지는 것만 같아 괴로워한다. 조급함은 점점 깊어지고, 자신을 자꾸 작게 만든다.


이 사회는 실패에 너그럽지 않다. 빨리, 효율적으로,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언제나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속도’에 집착하게 된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트레드밀 위에서 잠깐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기분. 누군가의 표현처럼, 한국 사회는 모두가 ‘초고속 트레드밀’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이 올라탄 트레드밀은,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르다.


그런 분위기는 러닝 문화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몇 달 전, 나도 유료 러닝 클래스에 참여해봤다. 거기에는 자신의 기록을 단 몇 분이라도 줄이기 위해 매일같이 훈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 러너는 서브 3를, 여자 러너는 3시간 30분 완주를 목표로 고강도 훈련을 반복한다. 그들의 열정은 참 멋지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문득, 입시 학원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떠오른다. 일타 강사의 강의, 반복되는 문제 풀이, 잠시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빡빡한 하루. 똑같이 땀 흘리고 노력하지만, 어쩐지 그 과정이 꼭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나에게 달리기는 조금 다르다. 성적표 같은 기록도, 누군가와 비교되는 페이스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가볍게 만들고, 숨을 크게 들이쉬기 위한 시간이다. 달리고 난 뒤 몸을 감싸는 땀과 바람, 그게 전부다. 그렇기에 나는 빨라지고 싶은 마음도,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 싶은 욕심도 없다. SNS에 자랑할 만한 멋진 수치는 없어도, 내게는 그저 달리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꼭 빠르게 달려야, 달렸다고 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두 번, 천천히 동네를 돌며 달리는 것도 러닝이다.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며 걷다 뛰다 하는 것도 충분히 러닝이다. 어떤 페이스든, 어떤 모습이든, 결국 모두가 자신만의 러너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점점 ‘달리는 이유’보다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에 더 신경 쓰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요즘 청년들은 ‘갓생’이라는 단어처럼,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낸다. 자격증을 따고, 공부를 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끊임없이 갈아 넣는다. 그 모습은 정말 대단하고, 그만큼 애틋하다. 하지만 그 노력의 끝에서 원하는 걸 얻지 못했을 때, 너무 쉽게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게 된다. 자신이 꿈꿔온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부모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탓한다.


하지만 조금 늦게 출발해도 괜찮고, 느리게 도착해도 괜찮다. 삶도 러닝도, 남들보다 빨라야만 멋진 건 아니다. 누구나 빠르게 달릴 필요는 없다. 나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달리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다. 내 기록이 겨우 Sub5여도, 5시간이 넘는다고 해도, 나는 내가 해낸 그 걸음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긴다.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바래본다. 느리게 달리는 러너들이 더 많아지기를. 마라톤 대회의 컷오프 시간이 5시간이 아니라 6시간, 7시간이 되기를. 그래야 나처럼 느린 사람도, 조급함 없이 달리며 대회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기록보다 중요한 건, 그날의 햇살, 바람, 응원, 그리고 내 안에서 솟아나는 뿌듯함일 테니까.


우리 모두는 달릴 자격이 있다.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러니 인생도, 러닝도. 느리게 달려도 괜찮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