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핸드드립을 하던 시절, 한동안 같은 문제로 고민했다. 커피가 너무 쓰거나 너무 얇았다. 원두 탓이라고 생각했다. 새 원두를 사도, 물 온도를 바꿔도 비슷했다.
어느 날 그라인더를 조금 굵게 조정해봤다. 맛이 달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문제는 분쇄도였다.
분쇄도는 커피 입자의 크기다. 이 크기가 물과 커피의 접촉 방식을 결정한다.
입자가 곱게 분쇄되면, 표면적이 넓어진다. 물이 천천히 통과하면서 추출이 길어진다. 성분이 충분히, 때로는 과하게 빠져나온다.
입자가 굵게 분쇄되면, 물이 빠르게 통과한다. 추출 시간이 짧아지고 성분이 덜 빠져나온다.
너무 곱게 갈면: 쓴맛, 텁텁함, 묵직함 → 과다추출 위험
너무 굵게 갈면: 산미가 강하고 얇은 느낌 → 과소추출 위험
도구마다 적합한 분쇄도가 다른 이유도 여기 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약 9바(bar)의 고압으로 25~30초 안에 추출한다. 짧은 시간에 충분한 성분을 뽑으려면 매우 곱게 갈아야 한다.
브루잉 도구(드립, 프렌치프레스 등) 는 낮은 압력으로 2~4분 동안 천천히 추출한다. 에스프레소보다 굵게 갈아야 물이 원활히 통과한다.
에스프레소용 분쇄도로 드립을 내리면 물이 막혀 과다추출이 된다. 반대로 드립용 굵기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면 성분이 부족해 밍밍하다.
레시피나 설명서에서 추천하는 분쇄도는 참고일 뿐이다. 절대 기준이 아니다.
도구의 구조, 물 온도, 원두의 로스팅 정도에 따라 같은 분쇄도도 다른 결과를 낸다. 권장 가이드로 시작하되, 맛을 보면서 조정해가는 과정이 핵심이다.
분쇄도를 바꾸면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정리하면 이렇다.
굵게 조정 → 추출이 빨라진다. 산미가 살아나고 전체적으로 가볍고 산뜻해진다.
곱게 조정 → 추출이 느려진다. 바디감이 묵직해지고 쓴맛이 강조된다.
드립 커피가 지나치게 쓰고 묵직하게 느껴진다면 분쇄도를 약간 굵게 해보자. 단, 분쇄도 하나만 바꾸면 안 된다. 물 온도와 추출 시간도 함께 영향을 받는다. 전체 밸런스를 보면서 천천히 조정해야 한다.
나만의 분쇄도를 찾는 방법은 단순하다.
1. 기본 권장 분쇄도로 시작한다.
2. 추출 속도(물이 빠지는 시간)를 확인한다.
3. 맛을 보면서 산미, 단맛, 바디감을 살핀다.
4. 조금씩 굵게 또는 곱게 조정한다.
5. 변화를 기록하고 비교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도구와 원두에 맞는 분쇄도가 몸에 익는다.
분쇄도는 커피 맛을 만들어가는 첫 번째 손잡이다. 오늘 내린 커피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라인더 다이얼을 한 칸 돌려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