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유럽여행을 싣고
“팀장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내 말 한마디에 그의 눈은 동공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도 그럴 듯이 곧 있으면 나는 재직한 지 1년을 앞둔 시점이었고, 업무에 별 탈 없이 8개월가량 화기애애하며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요. 지금이 아니면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나는 갑작스레 퇴사를 통보했고, 주어진 인수인계 기간은 한 달이었다. 유럽여행을 간다는 것 외에는 정해진 계획은 딱히 없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짧게 집중적으로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퇴사를 통보하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했다. 이번엔 잘 다니는가 싶었던 직장을 관두었다는 말에 일차로 당황스러워했고, 혼자 한 달 뒤 유럽으로 떠나겠다는 말에는 포기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으셨다.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고 몇 년 전부터 노래를 불렀던 게 예방 주사를 놓은 셈이었다.
그날 밤 내가 진짜 꿈꿔왔던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잠이 오지 않았다. 일단 저질러놓긴 했으나 ‘혼자 가서 해코지를 당하는 건 아닌지’, ‘매일 정해놓은 길로만 다니는 길치인 내가 잘 돌아다닐 수는 있을지’, ‘여권을 도둑맞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혹여나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테러를 당해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닌지’ 등등 설렘은 금방 두려움으로 바뀌어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을 휘저었다.
유럽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사진과 책으로만 봐왔던 유럽의 모습이 궁금했다. 한국과는 달리 몇십 년 된 성 모양의 건물로 이루어진 거리의 모습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여행을 하면 잃어버렸던 내 모습을 되찾을 것 같았다. 멋모르고 패기 넘치던 어린 시절 때의 자신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나의 꿈, 처음 만난 사람과 색안경 없이 어울렸던 내 모습, ‘안될게 뭐가 있어’라며 앞뒤 안 가리며 무조건 도전하고 봤던 정신력까지 전부 내가 되찾고 싶은 것들이었다. 하루하루 지루함이 반복되는 일상에 나는 ‘나’를 점점 잃어갔고, 그럴수록 나는 더 여행을 갈망하고 있었다.
한 달 뒤 여행을 떠나는 디데이 날. 최대한 짐을 뺏는데도 캐리어의 배는 터질 듯이 빵빵했다. 한 달 동안 입고, 먹고, 씻는 짐과 컵라면과 김치 등을 캐리어에 옮겨 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최종적으로 준비물 체크 리스트 표까지 점검하고 나서야 준비를 끝마쳤다.
캐리어를 이끌고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기분이 참 복잡 미묘했다. 평소 퇴근할 때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캐리어를 쥐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었다. 감출 수 없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버스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면 ‘행복해 보이네. 나도 떠나고 싶다.’라며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여행은 집을 나와 공항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공항버스 의자를 최대치로 눕힌 채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그제야 조금씩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붙이니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대기 중인 비행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비행기들은 비장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준비됐어.”라고 말하며 승객들을 기다리는듯했다.
이제 내가 탑승할 비행기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