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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여행이다

여행은 더 이상 탈출구가 아니다

by 세은

사회 초년생 시절, 나의 일탈은 여행이었다.

23살, 나는 어느 대기업 홈쇼핑에 입사했다.

신입사원일 때의 모습이 누구나 그렇듯,

나는 업무, 인간관계, 자아 등 모든 부분에서 많이 미숙했다.


입사 초반, 업무를 숙지하고 여러 거래처와 소통하느라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매일 집으로 돌아오면 몸이 힘이 빠져 녹초가 되었고,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쓸데없이 열정은 넘쳐서 출근하는 지하철에선 업무 프린트를 보며 공부를 했고, 저녁에는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빨리 꺼져버리듯이 나의 불타오른 열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들보다 훨씬 빨리 번아웃이 찾아왔다. 회사에 취업하고 월급을 받는 생활이 감사함에서 점점 지루함으로 바뀌어 갔다.


어느 순간 회사가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회사는 내가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의자에 투명 끈을 묶어 놓은 것 같았고, 큰 공간이라고 느껴졌던 사무실은 점점 좁아지던 나를 옥죄였다.


더 이상 친구들과 퇴근 후 술자리를 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차를 쓰고 해외여행을 가기로 계획했다.


여행지는 태국 방콕, 새벽 비행기였다.


저녁 6시, 나는 회사를 퇴근한 후 캐리어를 끌고 회사 앞에 있는 공항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퇴근길이라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나는 캐리어를 들고 공항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짜릿했다.


‘아, 행복하다.’ 대학생 때 이후 오랜만에 느껴본 일탈이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삶이 펼쳐질 것 같은 그 설레는 기분에 그동안 쌓아왔던 도파민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그때부터 나의 탈출구는 ‘여행’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무료할 때,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짐을 챙겨 어디론가 떠났다.


그러다 보니 점점 여행에 의존하게 되었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무작정 여행을 떠나다 보니, 1년의 절반을 여행비로 쓰게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여행의 행복감이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오히려 나는 떠나기 전보다 훨씬 더 크게 공허함과 헛헛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분명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근데 왜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거지? 왜 나는 다시 외롭고 공허한 기분을 느끼는 거지?’ 이런 기분들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잠깐 여행으로 현실을 도피한다고 해서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 다니던 회사, 나의 업무, 나와 주변 사람들은 항상 똑같았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하루가 반복된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어릴 땐 여행을 가야만 자유를 얻는다고 믿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탈출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행만이 자유가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일탈이자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연습 끝에 나는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싫어하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삶은 늘 매일 매 순간 새롭기 때문이다.

매일이 같지 않으니

나는 이제 매일을 여행하듯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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