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글렌 서울 - 상수동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43 1층
키워드: 노르딕 로스터리, 빈티지, 라이트 로스팅
푸글렌이 서울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북유럽을 기반으로 한 로스터리가 한국에 발을 넓히기 시작한다더니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푸글렌 서울이 생기기 전에는 근처 나라 일본에 있는 푸글렌 매장에 한국인 손님이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 딴에는 거점이 아닌 곳에 분점은 낸 가게에 인산인해를 이룰 일인가 싶어서 ‘흥, 그런 유행도 있군’ 하며 푸글렌의 인기를 외면해 왔다. 하지만 한국에 생긴 이상, 그것도 집과 가까운 동네에 생긴 마당에 안 가 볼 이유가 없지 않나.
날이 푸근하고 볕이 강한 초겨울 어느 날, 무작정 집 밖을 나와 행선지를 고르며 발을 정처 없이 옮기던 와중에 문득 ‘아, 오늘은 푸글렌에 가보자’하는 다짐이 들었다. 즉흥적인 인간의 주말이란 이토록 무책임하고 느슨하게 흘러가는 법이다.
7011번 지선버스를 타고 상수동으로 갔다. 상수역 바로 근처라니 조금 의외의 장소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저 멀리에서부터 종이학 모형의 붉은 로고가 눈에 띄었다. 홍대로 빠지는 길목 쪽에 있는 늘 오가던 그 거리에 버젓이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리도 익숙한 거리에 낯선 로스터리가 자리한 풍경이라니. 어쩐지 이질적이라 마음속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도 잠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목재 장식으로 꾸며진 내부 공간이 보였다. 처음 와 봤지만 ‘아, 과연 푸글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세가 있는 공간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바 형태의 공간이 돌연 시야에 들어왔다. 칵테일 바를 연상하게 하는, 어쩐지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가 모자를 휙 벗으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럼을 한 잔 주문할 듯한 쿨한 분위기다. 바닥과 벽은 목재를 사용하여 빈티지한 느낌. 곳곳에 장식된 오브제는 유럽 빈티지풍을 사용하여 예술 작품을 구경하는 기분까지 든다. 정화된 공간 분위기 덕분일까? 사람들은 정돈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나 역시 쿨한 느낌으로 주문해 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메뉴판을 쓱 훑어보고는 가장 멋있어 보이는 메뉴 하나를 골라,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당당하게 말했다. '더블 라테 한 잔 주시겠어요?'
유럽에 가본 적이 없어서 본토의 맛에 대해서는 다룰 수 없으나, 유럽을 베이스로 한 로스터리 원두를 몇 번인가 마셔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었다. 프렌치에 가깝게 다크 로스팅한 진하고 고소한 원두를 선호하는 다수의 한국인 취향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원두다. 맑고 톤이 옅으며 어떤 면에서는 떫고 종이 같은 질감의 원두다. 맛이 희미하지만 그 안에서 최적의 밸런스를 찾아 로스팅한 기법이 눈에 띄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고 깨끗하고 깔끔한 맛을 구현해 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노르웨이에서 온 푸글렌은 꽃과 열매의 산미가 특징적이었다. 보랏빛 꽃의 산뜻한 느낌이 내가 주문한 더블라테에서 느껴졌다. (이번에 내가 주문한 음료는 라테였지만 가능하면 원두의 특징을 살려서 내린 프렌치 프레스나 드립을 주문해 먹어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원두의 특징이 꽤 독특한 편이라 향미를 최대한 느끼려면 그 편이 낫다.)
푸글렌 외에도 독일의 보난자 커피와 덴마크의 프롤로그 커피를 맛본 적이 있다. 보난자 커피는 국내 유통 시장 내에서도 잘 보급되어 있어서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난자는 맑은 풋콩이 주는 떫은 산미가 매력적이었다. 프롤로그는 채도 낮고 맑은 산미가 특징으로 눈에 띄는 원두였다. 두 로스터리에서 제공하는 원두 역시 우유를 곁들인 베리에이션보다는 원두 특징을 살린 핸드드립으로 마시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맑은 맛이라서 그런지 더운 여름날에 아이스로 마셨을 때 그 특징과 장점이 폭발하는 듯했다.
카페를 나오기 전에 홀빈을 구경하고 시향을 하다가 과테말라가 궁금해져서 한 봉지를 사서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푸어오버로 내려 마셔보았다. 매력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꽃향이 특징이다. 매력적인 원두였다.
방금 전 카페에서 읽은 책의 주인공이 재회 후 함께 갔던 남산 공원에 가고 싶어졌다. 무계획적 인간은 끝까지 무책임하고 즉흥적인 선택을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상수역의 좁은 2번 출구로 들어갔다. 순간 이동을 하는 마법사가 지하 세계 포털로 장소를 유영하듯 목적지를 바꿨다. 6호선 약수역에서 환승을 한 번 하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렸다. 푸글렌을 방문한 어느 주말의 아침은 이렇게 조금은 즉흥적인 여행을 즐긴 하루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