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설날
까치 까치설날이다. 할머니 댁이 북적거린다. 엄마, 아빠, 오빠, 은주, 준영이, 영희언니 둘째삼촌부부와 은숙, 은선, 은미, 셋째삼촌 부부와 기영, 은옥, 막내삼촌 온 가족이 모였다.
해마다 남자어른들은 동네를 빙빙 돌며 어디 얻어먹을 것 없나 어슬렁거리다 술 취해 밤늦게 쉰내를 풍풍 풍기며 오는데 12살이 되던 새해전날 밤은 할머니가 건넌방에서 없던 윷을 찾아와 온 가족이 윷놀이를 했다.
조용히 시작하던 윷놀이가 점점 시끄러워지고 어른들이 윷을 어찌나 요상하게 던지는지 몸을 비비꼬다가 네 개의 윷 중에서 하나는 꼭 천정 형광등까지 스치게 던진다. 놀이에 신난 어른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한 번도 저렇게 모여앉아 크게 웃고 우겨대며 장난치는 모습은 본적이 없는데 오래살고 볼일이다.
조용조용하고 목소리도 안 들리던 내숭쟁이 둘째 셋째 작은엄마가 큰소리로 박수치며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윷을 던질 때마다 애들은 하나같이 지들 엄마편이다. 남동생은 자기도 던지고 싶다고 때를 쓰며 윷판에 끼어들고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엄마 대신 동생이 윷을 던지는데 이게 웬일인지 모가 연거푸 3번나오고 윷이 2번나오는데 눈이 휘둥그레지는 여자팀이 박수치며 소리 쳐 귀가 째지는줄 알았다.
“잘한다잘한다 준영이가 최고네”
응원전까지 하며 어른들이 웃으니 괜히 따라 웃게 되고 큰 박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양손으로 귀를 막아본다. 할머니하고 엄마 작은엄마들은 한사람씩 부엌에 오가며 부침개, 식혜, 수수부꾸미, 다식, 곡주를 번갈이가며 내오고 아궁이에 불을 많이 때서인지 신이 나서 인지 다들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열이 올라 우리는 진작에 겉 옷을 벗어 던지고 내복 바람으로 논다. 윷놀이가 끝났나 보다. 놀이에 재미가 붙었는지 이번에는 담료를 깔고 고스톱으로 이어진다.
“돈 있는 사람은 돈 갖고 붙어”
라며 삼촌이 흥을 돋운다. 오늘은 어른들의 날 인 듯 밤이 깊도록 놀이에 빠진 어른들의 웃음소리에도 졸음이 오고 동생은 놀다 말고 티비 밑에 들어가 잠이 든다.
벌써 아침이 왔나 둘째삼촌이 깨우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방안으로 들어오는지 차가운 아침 공기에 장국냄새, 기름 냄새도 같이 들어왔다. 동생들은 이불속에서 서로 싸우며 자는지 하나같이 대가리를 삼발을 하고 넋 나간 듯 앉아있다.
“세수하고 세배해야 세배 돈 준다 ”
할아버지 한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나 총알처럼 밖으로 나간다. 부엌 쪽 마루 귀퉁이에는 반질나게 닦은 목기가 광주리에 담겨있고 반대쪽 끝부분에 김이 모락거리는 따스한 세숫물에 단체로 고양이 세수를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땅에 질질 끌렸는데 어느새 키가 컸는지 껑충하게 올라온 작은 한복을 간신히 껴입고 서로 옷고름을 묶어주느라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부산을 떤다. 작거나 말거나 한복을 입어야 세배하는 맛이 나고 버석버석 소리 나는 치맛단을 비비고 다니는 것은 새해 첫날만 느껴보는 유일한 맛이다. 한 뼘이나 길게 산 한복인데 치마가 짧으니 내년에는 동생에게 물려줘야 하나보다. 빨간 치맛단 끝부분에 찍힌 금박무늬에 넋이 나가 한참을 만져보고 당겨보고 혹시나 금덩어리라도 떨어질지 몰라서 별짓을 다해도 손톱만큼도 안 떨어진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를 하고 엄마 아빠에게 세배를 하고 둘째삼촌과 작은 엄마에게 세배를 하고 셋째삼촌과 작은 엄마에게 세배를 한다. 세배를 할 때 마다 주는 세뱃돈을 작은 복주머니에 꼭꼭 접어 넣고 이 많은 돈으로 무엇을 사야하는지 복주머니가 터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