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곡리 방

작은유리창

오곡리 방

by 이강

2. 작은 유리창

할머니 댁의 이른 새벽은 바닥에 깔린 미숫가루처럼 진하다.

성정동 집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벽의 움직임을 보려고 꿀보다 달콤한 아침잠을 줄인다. 이불속에서 뒤죽박죽 깊은 잠에 빠진 동생들의 모습은 낮에 떼쓰고 들개새끼들처럼 날뛰던 그 애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나같이 천사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어떤 날은 일찍 눈을 떠도 따스하고 몽글거리는 이불속이 좋아서 천정을 보며 벽지 모양을 따라 미로 찾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날은 눈을 뜨자마자 괜히 차가운 밖이 궁금해져 밖을 내다보려 방문으로 곧장 향한다.

할머니 댁 방문은 창호지로 붙인 얇은 종이 문으로 처음에는 종이로 된 방문이 무슨 장난인가 싶어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려 몰래 눌러봤지만 마음먹고 앉아서 침을 듬북 발라 적시고 적셔 종이 결을 갈라 두 손으로 벌려 구멍을 내야 겨우 틈이 보일 정도로 단단하다. 뭐든지 야무진 할머니솜씨는 그리 만만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고 창호지 방문조차 야리야리하게 꽃잎과 단풍잎을 넣어 햇살이 비추면 꽃밭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우리 할머니는 낭만을 안다. 집집마다 어느 집이나 방문중간쯤이면 어김없이 한사람만 볼 수 있는 아기손바닥만한 유리창이 하나씩 붙어 있고 새벽 시간이 손바닥 유리창을 혼자만이 독차지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평소에 재미난 일을 하다가도 작은 창문구멍에 눈이라도 댈 때면 동생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서 탐을 내니 새벽시간이 최고다.

조심스레 작은 유리창에 자리 잡고 눈을 갖다 대자마자 밖의 촉촉한 새벽공기가 창 너머로 느껴진다. 아득하게 보이는 앞산 꼭대기 정상에는 칡덩굴을 칭칭 감은 물구나무서기 나무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 나무는 해질 녁 어둑어둑해지면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처럼 보여 일부러 안 보려고 머리를 흔들어 어지럽게 만들거나 눈을 반쯤 감고 스쳐보곤 했는데 새벽에는 별 마음 없이 바라볼 만 했다. 커다란 산 앞으로 그 옆으로 또 그 옆으로 다섯 개의 산이 겹겹이 보이고 새벽공기에 축축하게 젖은 산은 안개를 이불처럼 끌어안고 있다.

언덕 위에 있는 할머니 댁 아래로 넓게 보이는 밭에는 콩이 가득할 때, 들깨가 가득할 때. 고추가 가득할 때마다 마을 분위기가 달라지니 콩이 가득한 여름은 녹색물이라도 흐르듯 온통 진녹색으로 보이고 들깨가 가득한 해에는 방에 앉아 있어도 들깨향이 고스름고스름하게 올라와 찬장에 들기름 뚜껑이라도 열렸나 갸우뚱거리게 되며 고추밭에 고추가 가득하면 울긋불긋 물이 들고 밭 가생이 부분에는 옥수수가 삐죽빼죽 꽂혀 있어 엉켜진 실패를 쑤셔 박아 놓은 듯 옥수수수염은 익어 갈수록 삼발을 하고 있다.

밭 옆으로 오솔길이 보이다 안 보이다 구불구불 그 길은 밀가루보다 고운 흙이 깔려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주먹보다 큰 차돌멩이가 오솔길에 뒹굴 거리고 길바닥 가운데 갈라진 골 사이로 하늘에서 떨어진 미꾸라지가 심심찮게 보인다. 하얀 돌을 찾는다. 찾아도 없던 차돌이 비 오는 날이면 하늘에서 쏟았나 땅에서 쏟았나 많이도 나온다. 잡기 좋은 차돌을 두개를 주워 두툼한 이불속으로 들어가 맞부딪히면 반짝반짝 불꽃이 튀는데 불꽃도 좋지만 불꽃이 튈 때마다 나는 불 냄새가 좋다. 힘껏 부딪히다 반짝이는 불빛에 정신 팔려 손가락이 부딪혀도 동생들 앞에서‘아얏’소리 못하고 참느라 눈물이 쏙 빠지기도 한다.

작은 창문에 홀딱 빠져 이 생각 저 생각하며 혼자만의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새 동생이 일어났는지 툭툭 친다.

아직도 볼 것이 많다. 같은 새벽, 같은 산, 같은 나무, 같은 길이라도 볼 때마다 다른 할머니 댁 새벽은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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